백지광고 사태
동아일보는 1974년 12월께부터 1975년 1월초까지 백지광고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광고는 예약제였기 때문에 미리 동판을 만들고 강판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예약한 광고주들이 돌연 광고를 철회했다. 동아일보는 일주일 치 분량의 광고를 예약 받았는데 순식간에 일주일 치 광고가 빠지면서 그 자리를 채울 여건이 안됐다. 이처럼 광고백지 상태가 된 것은 중앙정보부의 탄압 때문이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가 공권력을 발동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조직적으로 탄압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동아일보와 계약한 광고주들을 불러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한 것이다. 이처럼 중앙정보부가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한 것은 동아일보가 유신정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기업들에게 광고를 해약하라고 강요했고, 광고수입으로 먹고 사는 신문사로서는 타격을 받았다. 이에 동아일보 독자들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 빈 광고면에 작은 개인 광고를 넣기 시작했다. 1975년 새해가 밝으면서도 대다수 시민들이 자비광고를 했다. 자비광고 1호 독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1974년 성금을 모아서 동아일보에 줬다고 한다.경영난 이유로 해고 통지
하지만 신문사 경영진은 정권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1975년 3월 17일 농성 중이던 160여명의 기자와 사원들을 내쫓게 됐다. 이에 그 다음날인 18일 권영자를 위원장으로, 이부영을 대변인으로 선임하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결성된다. 해고된 기자들의 복직과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이행을 요구했지만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주요 인물들이 수차례 구속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들은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쫓겨난 해직기자들 및조선투위와 함께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설립을 주도했다. 민주화운동 이후 제6공화국이 탄생되자 동아투위와 1980년 해직언론인 및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 함께 한겨레 창간에 앞장섰고 1988년 5월 15일에 한겨레를 창간했다. 이후에도 언론 단체로서 존속하며 언론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위원장은 이명순이다.끝나지 않은 투쟁
해직기자들은 1975년부터 동아일보를 상대로 ‘해고처분 무효 확인소송’을 냈지만 1979년 1월 대법원은 경영상 문제라면서 회사 편을 들어줬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2001년 국무총리실 직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동아투위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고, 2006년에 동아투위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하자 위원회는 2년간의 조사 끝에 2008년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동아일보 측은 불복해서 2009년 3월 서울행정법원에 진실규명 결정 취소 소송을 내자 2010년까지 1~2심까진 동아 측이 패소했다가, 2013년에 대법원이 파기환송(2010두22856)을 내려 서울고법과 서울행법으로 각각 돌려지다 2014년 1~2심, 2015년 대법원 모두 동아일보의 손을 들어줬다. 2009년에 생존한 해직자 및 유가족 등 134명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가 2011년 1심 및 이듬해 2심에서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 당했으나, 2014년 대법원이 이들 중 권근술 외 14명은 시효가 아직 유지 중이라 판단 후 파기환송 시켜 2015년 서울고법에서 해직자 14명의 손을 들어줬고, 2016년 대법원도 같은 취지로 판결을 내렸다. 이마저도 2018년 ‘양승태 사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재조명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