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배경은
탄핵 배경은 몇가지가 있다. 우선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교력에 임정이 경악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1919년 9월 6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나, 상하이에 와서 자신의 직책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가 임시정부 각료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1919년 3~4월에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등 외교독립론자들이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사실이 임정 내부에 알려지면서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이승만 등을 비난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이라고 맹비난했다.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라고 건의했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면서 거절했다. 1921년 5월 29일 상하이를 떠난 이승만은 1922년 2월 호놀룰루로 귀환했다. 하지만 그해 6월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으로서 걸맞지 않는 행사를 해서 교포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이승만은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 남학생 12명, 여학생 9명을 ‘하와의 학생 고국방문단’으로 구성했고, 일본총영사관과 교섭해서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갖고 한국을 방문하게 했다.자금 문제도 걸려
임정은 계속해서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임정 의정원은 1922년 6월 10일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일주일 뒤인 6월 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역시 불구경하듯 처신했다. 무엇보다 임정을 가장 분노하게 했던 것은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사업을 빙자해 임시정부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활동비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을 이승만이 멋대로 사용한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임정은 1925년 3월 11일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발의했다. 결국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6년 만에 의정원에서 면직됐다. 헌법 절차에 따른 탄핵이었다.6년 동안 무책임의 끝을 보여줘
이승만이 1919년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 됐지만 무책임의 끝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임정이 노선 및 자금 문제로 분열을 보일 때 이승만이 리더십을 발휘해서 임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이 좀 더 빨리 다가왔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외교’를 앞세운 이승만의 노선과 무장독립투쟁을 앞세운 임정의 또 다른 노선이 갈등을 하면서 예고된 참사라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보다 일제가 국내에서 임정으로의 자금 운송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 자금줄이 막힌 상태에서 오로지 가능한 자금줄은 미국 한인사회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정의 이름으로 국채를 발행하고, 그것을 임정에 전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임정은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의거에 의해 중국 장개석 총통이 임정에 파격적인 지원을 할 때까지 자금난에 시달려 살아야 했다. 물론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에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자금난이 다소 숨통이 틔여지면서 광복군까지 조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