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의 어원
외국인이 깜짝 놀란 일은
복숭아의 경우 가장 큰 복숭아를 10개 정도 먹었고,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었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로는 20개 혹은 30개를 먹어치웠다. 닭 한 마리를 내놓아도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곱창과 생선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다. 조선사람들은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식사량이 일제강점기 들어서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단 밥그릇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모든 금속을 징발해갔다. 우리나라의 밥그릇은 놋그릇으로 돼있기 때문에 일본은 놋그릇도 눈독을 들였다. 이에 일본은 우리에게서 놋그릇을 빼앗고 사기그릇의 밥그릇을 줬다. 물론 일본 국민이 먹는 밥그릇에 비하면 상당히 사이즈가 큰 것이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작은 그릇이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서 징발하는 물자가 많아지면서 쌀 등 곡류의 징발도 많아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국민들의 먹어야 할 밥그릇도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한 밥그릇 회사에 따르면 1940년대 680mL에서 1950년대 670mL, 1960~70년대 560mL로 조금씩 줄어들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390mL로 급격히 줄었다. 이후 1990년대엔 370mL로 줄어들었고, 2000년대 들어선 290mL로 더 작아졌다. 현재 일반 가정과 식당 등에서 흔히 쓰이는 밥공기는 290mL(290g)짜리다. 1940년대 밥그릇 용량이 680mL인 점을 감안하면 약 40% 수준이다. 혹자는 박정희 시절 쌀 절약 정책 등으로 인해 1인당 밥 먹는 양을 국가가 통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우리 국민이 밥 먹는 양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밥그릇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은 밥 이외에 다른 것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고, 또한 밥 먹는 양만큼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양반이나 귀족층 아니면 말을 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하루에 수십리를 걸어다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칼로리 소비가 상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밥 먹는 양이 클 수밖에 없었다.박정희 정권 거치면서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점차 뚜벅이 생활을 지양하게 되면서 더 이상 많은 양의 칼로리가 필요하지 않게 됐다. 이런 이유로 밥의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부의 정책도 일조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백성들의 식사량을 강제적으로 줄인 것도 있고, 박정희 정권 들어와서 쌀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서 일부로 강제적으로 줄인 것도 있다. 하지만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 점차 밥 먹는 양이 줄어든 것도 있다. 사회적 현상에 정치적인 부분까지 합쳐지면서 밥그릇의 변화가 이어진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