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통일신라의 부흥, 정전제
[역사속 경제리뷰] 통일신라의 부흥, 정전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4.11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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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 드라마 태조 왕건 한 장면
사진=KBS 드라마 태조 왕건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정전(丁田)은 모든 장정에게 논밭을 나눠주는 제도이다. 신라의 촌락문서에 따르면 남자는 연령별로 구분해서 정(丁)·조자(助子)·추자(追子) 등으로 나뉘어 있고, 여자는 정녀(丁女)·조여자(助男子)·추여자(追男子) 등으로 나뉘었다. 정전의 정(丁)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흔히 통일신라는 부자 나라라고 부른다. 기록에 따르면 “경사(京師 : 경주)에서 해내(海內 : 울산 바다)에 이르기까지 가옥과 담이 연달아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고 돼있다. 또한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지 띠로써 덮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지 나무로 짓지 않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에 대한 외국의 기록을 살펴봐도 통일신라는 황금의 나라라고 표현돼 있다. 하다못해 개 밥그릇도 황금이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사진=KBS 드라마 태조 왕건 한 장면
사진=KBS 드라마 태조 왕건 한 장면

부자나라의 기본 정전제

통일신라가 고구려·백제를 통일한 후 경작할 땅이 넓어졌기 때문에 부자나라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정전제를 실시하면서 부흥한 나라가 됐다는 평가다. 정전제는 백성에게 일정한 면전의 토지를 나눠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세를 거둬들이는 제도이다. 다만 남자에게만 해당됐는지 아니면 여성도 포함이 됐는지 등에 대한 기록은 없다. 중국은 균전제를 실시했는데 21세 이상 59세까지의 남성에게 전 1경(100묘)을 지급했는데 그중 20묘는 영업전으로 자손에게 상속할 것을 허용했고, 나머지 80묘는 구분전으로 본인이 사망하면 국가에 환납해야 했다. 신라의 경우 국가가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했다는 것은 농민 본래 소유한 토지를 인정하거나 황무지를 농민에게 주고 경작을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유력하다. 정전제는 성덕왕 때(서기 722년) 실시됐다. 이 새로운 제도는 백성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는 제도이다. 그러면서 국가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왕위쟁탈전 그리고 수조권의 혼란

통일신라는 정전제를 실시하면서 백성들이 자기 땅을 갖게 되면서 그에 따라 농업생산량이 늘어나게 됐다. 농업생산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사치와 향락을 즐길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귀중품을 구입하는 경향이 강하게 되면서 그에 따라 상업이 발달하게 되고, 해외 무역이 발달하게 됐다. 문제는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 왕위쟁탈전이 발생하게 됐다는 점이다. 신라 중기까지만 해도 성골 귀족들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진골 귀족들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면서 “이번 기회에 나도 왕위에”라면서 왕위쟁탈전이 이뤄졌다. 왕위쟁탈전이 이뤄진다는 것은 중앙정부가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백성들이 갖고 있던 토지가 그 지방에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호족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사진=KBS 드라마 태조 왕건 한 장면
사진=KBS 드라마 태조 왕건 한 장면

호족은 여러 가지 형태로

호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일부는 도적떼였고, 일부는 군관이었다. 중앙권력에서 왕위쟁탈전에 패배한 진골귀족이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호족이 됐다.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면서 이들 호족은 지방 백성들의 정전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방의 호족이 됐다. 그들은 사병을 거느리기 시작했고, 그 사병으로 주변 영토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호족과 호족들간의 다툼이 발생했고, 급기야 일부 호족은 ‘왕’이라고 칭하게 됐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고려, 후백제 등으로 나뉘면서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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