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 접한 갈릴레오
1609년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개량해서 인류 최초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다.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이 증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천동설의 학설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명성과 돈을 얻는다. 1611년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한다. 교황은 갈릴레오의 명성 때문에 무릎을 꿇지 않게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 즉 천동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가 눈엣가시였다. 이런 이유로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고발까지 했지만 종교재판소는 근거가 없다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교황청이 ‘새로운 것’에 대해 민감해 하기 시작했다. 1611년 로마에 다시 방문한 갈릴레오는 논쟁을 통해 교황청의 이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교황청은 갈릴레오에 대해 더 이상 호의적으로 베풀지 안핬다.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 설파
결국 벨라르민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권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 1613년 ‘흑점에 관한 편지’라는 저서를 냈는데 일각에서 성서에 반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자 갈릴레오는 “성서에는 거짓이 없으며 성서는 잘못될 수 없습니다. 단지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 간혹 잘못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며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고 답변했다. 이에 성직자들은 갈릴레오를 적으로 여기고 종교재판소에 회부할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에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가르치고 옹호하는 것을 자제했다. 1632년 ‘천문 대화’를 저술했지만 6개월 만에 발행을 금지 당했고, 1632년 9월 23일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편지를 받았고, 1633년 2월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4월 12일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6월 최종 판결을 받았다.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서 혐의를 인정하면서 그때껏 연구한 것과 정반대로 지동설을 비난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해 감금령을 내렸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곧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갈릴레오는 종교적 반지성과 싸운 과학의 순교자인가
갈릴레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반지성과 싸운 과학의 순교자로 묘사한다. 천동설을 믿고 있는 교황청을 상대로 지동설을 설파한 인물로 묘사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카톨릭은 천동설을 교리로 삼은 바가 없다. 그리고 당시 종교재판은 ‘지동설이 맞냐 틀리냐’가 아니라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천동설은 교회가 가르치기는 했지만 믿어야할 교리로 가르친 것은 아니다.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것은 그가 지동설을 가르쳐서가 아니라 당시 유럽을 흔들었던 종교개혁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가톨릭 내부에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 갈릴레오가 연루됐고, 여러 저서들이 교회를 풍자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이다. 종교재판은 ‘지동설’이 맞냐가 아니라 지동설로 인해 초래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논했다.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진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나서면서 한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는 말로 알고 있는데 소설가의 창작에 불과하다 18세기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창작이라는 것이다. 바레티는 그의 작품에서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소에서 풀려나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은 교황은 천동설 신봉자라면서 교황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종교재판에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지동설을 완벽하게 증명하지 못하면서 재판 도중 지동설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어이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