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이후
3.15 부정선거로 인해 전국 곳곳에 시위가 번져 나갔다. 그리고 4월 들어서 서울에 상륙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대학 연합 시위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4월 11일 마산항 부두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충격에 빠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위에 소극적이었던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고려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서울 시내 대학의 전체 시위일은 21일로 확정했었다. 하지만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4월 16일 전체 신입생 환영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때 학생들이 모인 틈을 타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지만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의 움직임이 감지되면서 고려대 학생회는 행사를 18일로 연기했다. 18일 당시 10시 50분께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신호에 고려대학생 3천여명이 “문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면서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정치깡패의 피습
국회의사당에서 유진오 당시 고려대 총장과 이철승 의원 등을 면담했으며 학생들은 일단 저녁이 되면서 집회를 해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이에 시위대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학교로 복귀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찰차가 갑자기 시청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을지로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청계4가에서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소속 정치깡패들에게 습격을 받아 수십명의 학생들과 몇 명의 기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지만 학생 1명이 사망하게 된다.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구타 당하면서 길바닥에 나뒹구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실리면서 전국 학생들과 시민들이 분노하게 됐다.감히 학생들 건드리다니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깡패가 학생들을 팼다는 분위기여서 격앙됐다. 깡패는 사회적 쓰레기로 생각했고, 학생들은 보호돼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깡패들이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소식은 시민들을 시위에 동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 동아일보가 앞장 섰는데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가 인수한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의 전신이었기 때문이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해서 하와이로 망명 가야 했다.정치깡패의 최후
고려대학생들을 피습했던 정치깡패들의 최후는 그야말로 비참했다. 습격을 지휘한 임화수와 습격 현장을 주도했던 신정식은 교수형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정재 부하인 낙화유수는 죽을 때까지 해당 사건은 우발적이었고, 학생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발생했다고 주장했지만 계획적이었다는 것이 훗날 곳곳에서 증거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대로 경찰차가 시청이 아닌 을지로로 방향을 틀은 것도 깡패들에게 유도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정재는 당시 동대문파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