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에 판잣집 이뤄
어릴 때 이름은 박정렬인데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면서 홀어머니와 남은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주변 사람들은 효자로 기억을 햇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어머니와 막내동생은 사찰에서 허드렛일로 연명해야 했고, 여동생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박흥숙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사법시험에 준비했다고 한다. 법관이 된다면 좋은 집에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로 무등산을 삼았다. 당시 무등산 자락에는 20여 가구 빈민촌이 형성돼 있었다. 빈민촌 사람들이 박흥숙과 그의 가족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자신들의 음식을 나눠줬다고 한다.운명의 그날
1977년 즈음 무동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무등산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해야 했다. 이에 4월 20일 광주시 동구청 소속 건설반장인 오종환 반장과 동구청 소속 일용직 철거반원 7명은 무등산 자락에 있는 판자촌을 철거하기 위해 산행을 했다. 원래 20여 가구의 판자촌이 형성돼 있었지만 구청에서 판자촌 주민들에게 알려서 상당수의 집이 철거된 상태였지만 8가구는 남아있었다. 수사 결과 등을 살펴보면 그날 철거할 당시 박흥숙 어머니와 철거반원들이 시비가 붙었는데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리면서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고 동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철거반이 가재도구를 모두 움막집 바깥으로 옮길 때 박흥숙은 그들과 함께 가재도구를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살인사건의 시작은 철거반원들이 집에 불을 지르면서 시작된 것이다. 철거반원 입장에서는 단순 철거만 할 경우 움막집을 다시 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소를 시켜야 한다고 윗선에서 명령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집 지붕 위에는 박흥숙 어머니가 무당의 집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 30만원이 숨겨져 있었다. 수사 결과 등에 따르면 이때까지도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4명의 철거반원들을 살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그의 움막집으로부터 300여m 정도 떨어진 집에는 김복천과 그의 처가 살고 있는 움막집에 불을 지르면서이다. 당시 박흥숙은 “저 집에는 병에 걸린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선처해달라”고 요청했고, 철거반원들 역시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박흥숙은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박흥숙은 자신이 만든 사제 공기총으로 철거반장 오종환을 향해 위협 사격을 했다. 당시 무등산에는 짐승들이 있었기 때문에 쫓아내기 위해 사제 공기총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철거반원들을 묶었는데 허술하게 묶인 이유 때문에 철거반원들이 묶인 포박을 풀고 반항하면서 박흥숙은 망치로 철거반원들을 공격해 4명을 숨지게 만들었다.결국 형장의 이슬로
살인을 저지른 후 도주를 했지만 결국 검거됐고,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는 진술을 했다. 박흥숙 구명운동이 있었지만 사형 선고가 이뤄졌고, 3년 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흥숙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언론들은 주로 박흥숙 만행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서 각종 가짜뉴스를 생산했다. 대표적인 것이 박흥숙 어머니가 무등산에서 거대한 굿판을 벌려서 광주시내 돈을 긁어가는 무당이라는 보도였다. 또한 박흥숙이 엄청난 무예를 연마해서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실상 박흥숙이 배운 무술은 조선시대 무예였던 정도술 정도였다. 또한 사제 공기총은 쇠팡프로 만든 딱총 정도였다. 살해현장인 구덩이는 언론에서 사람이 오면 죽이기 위해 이전부터 파놓은 것이라고 보도됐지만 실상 박흥숙의 공부방이었다. 박흥숙에 대해 ‘의인’이냐라는 이야기와 ‘살인자’라는 사이에서 여러 가지 논란은 아직까지도 있다. 다만 개발만능주의가 낳은 민낯이라는 의견은 변함없다. 박정희 시대 당시 철거민의 애환 등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개발부터 하고 보자는 식이 박흥숙 살인사건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