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22일 미스코리아 공중파에서 처음 중계
[역사속 오늘리뷰] 4월 22일 미스코리아 공중파에서 처음 중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4.22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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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미스코리아 대회./사진=연합뉴스
2015년 미스코리아 대회./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2년 4월 22일은 미스코리아가 공중파에서 처음으로 생중계를 했던 날이다. 당시 KBS, MBC, TBC에서 처음으로 중계를 했다. 미스코리아는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사절로 과거에는 높은 인기를 누렸고, 미스코리아 입상 경력으로 연예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와 여성단체의 반발, 심사과정에서의 뇌물 수수 등이 밝혀지면서 대중의 공감을 사지 못하게 되면서 위상이 흔들리면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가 됐다.

일제강점기부터 미인대회

우리나라 최초 미인대회는 1931년 시인 김동환이 창간한 잡지사 삼천리가 개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个色)’으로 사진 응모를 통해 선발했다. 총 326명이 응모해서 14명이 입상했다. 1등을 특상이라고 불렀는데 여류문인 최정희 여동생 최정원이 선택됐다. 그 이후 1940년 8월 일본 잡지사인 ‘모던 니뽄’이 황기 2600년을 기념해 미스 조선을 선발하였는데, 전남 목포 정명고등여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김영애가 선발됐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 미인대회는 1949년 월간잡지 ‘신태양’에서 미스 대한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사진 응모를 했고, 명동에 해당 사진을 걸어놓아 지나가는 사람의 투표로 미인을 선발하려고 했다. 47명의 사진이 응모됐고, 7명을 추렸는데 주최측에서 미인대회에 응모할 정도의 미모는 아니라고 판단했고, 기자들에게 외모가 되는 미인을 찾아오라고 하자 다방 마담이나 요정 직원들을 찾아내서 20명을 채웠다. 한국전쟁 막바지에 달했던 1953년 5월 피난 수도였던 부산시청 강당에서 중앙일보 주최로 제1회 여성 경염대회로 미스 유니버스에 파견할 목적으로 개최됐다. 당시 수영복 심사가 있었지만 수영복 심사는 비공개로 진행하고, 나머지는 공개 진행하기로 했지만 인파가 너무 많이 몰린 바람에 모두 비공개로 진행했다. 그리고 1957년 5월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 한국일보 주최로 세계대회에 파견할 한국 대표를 뽑는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리게 됐다.
1959년 미스코리아 당선자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사진=국가기록원
1959년 미스코리아 당선자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사진=국가기록원

공중파 중계로 인지도 높아져

1972년까지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미스코리아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제3회 대회 진 당선자 오현주는 그해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참가해서 상위 15위 본선 진출을 이뤘을 뿐 아니라 스피치상, 선외상, 스포츠상, 인기상 등 특별상 4개 부분에서 수상했다. 마땅한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 미스코리아 대회는 국가적 행사였다. 대회 참가 후보자들은 시가행진을 했고,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1963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5위로 입상한 미스코리아 진 김명자는 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렸다. 미스코리아에 참가하기 위해 기혼자인 것을 속이고 참가했다가 들통난 사례가 있는 등 미스코리아 대회에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1972년 공중파 3사가 합동으로 실황 중계를 하면서 미스코리아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에 미스코리아 화장법이나 헤어스타일 등이 크게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이른바 ‘사자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1980년대부터 쇠퇴

하지만 미스코리아는 1980년대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우선 미스유니버스 입상자가 점차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스유니버스 대회는 서구적 외모를 미의 기준으로 삼은 반면 미스코리아는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한때 미스코리아도 서구적 외모를 미의 기준으로 진선미를 선출하려고 했지만 우리나라 정서와는 맞지 않으면서 미스코리아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다. 결국 미스코리아 대회는 2011년 미스 월드 출전권을 상실했고, 2016년부터 미스유니버스에 나갈 한국 대표를 뽑는 권리를 상실하게 됐다.
1963년 미스 유니버스 5위, 미스 월드 Top14, 미스 인터내셔널 5위의 성적으로 당시 세계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나라 코리아의 이름을 알린 공로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위원장에게 초대받은 모습./사진=국가기록원
1963년 미스 유니버스 5위, 미스 월드 Top14, 미스 인터내셔널 5위의 성적으로 당시 세계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나라 코리아의 이름을 알린 공로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위원장에게 초대받은 모습./사진=국가기록원

여성의 성상품화 논란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여성단체에서는 여성의 성상품화 이유로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공중파에서 생중계했던 미스코리아 대회가 케이블로 쫓겨나게 됐다. 그나마 케이블에서 방송했던 미스코리아도 이제는 유튜브에서 방송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수영복 심사에 대한 반대 여론이 끊이지 않고 나오면서 수영복 심사도 폐지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 유명 미용실과 주최자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면서 미스코리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다양화되면서 미인대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과거 여성들이 사회진출의 발판으로 미스코리아가 거의 유일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진출을 할 수 있기에 굳이 미스코리아를 희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스코리아가 쇠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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