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자금 부동산으로 몰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면서 시중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올림픽이 끝나자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면서 집값과 전월세비가 폭등했다. 여기에 5공 청문회로 5공 비리가 드러나자 노태우 정부의 지지율이 급속도로 하락했다. 이에 대규모 주택건설 사업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1987년 4월 27일 분당과 일산 등에 신도시를 세운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물론 그 이전에 중동, 평촌, 산본 등에 주택단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해당 지역은 기존 구도심과 인접해 있었지만 분당과 일산은 기존 구도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구조였다. 이런 이유로 1기 신도시 발표가 된 것이다. 기존 구도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신도시 계획으로 발표된 것은 당시 서울 외곽 근교의 허허벌판 농촌을 대규모 아파트로 탈바꿈 시키는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당시 분당이나 일산은 논이나 밭 뿐이었다. 따라서 도시 조성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던 최적의 조건이었다. 분당이나 일산은 광활한 대지에 조성됐기 때문에 아파트 배치가 널찍하고 녹지도 충분히 확보됐지만 중동, 평촌, 산본은 기존 시가지의 미개발지에 조성됐기 때문에 아파트 배치가 빽빽하고 계획 인구밀도를 높게 잡은 편이었다. 1기 신도시에 부동산 투기 자금이 몰려서 한때 부동산값 폭등이 일어났지만 1991년 공급 물량이 풀리면서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토지공개념 3법, 부동산 거래 실명제 등이 시행되면서 1990년대 집값 안정을 이뤄냈다. 1990년대만 해도 분당과 일산에 산다고 하면 좀 사는 집안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것은 서울의 부유층이 또 다른 엘도라도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양 때의 가격과 비교해서 하루가 다르게 아파트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신도시 개발이나 뉴타운 개발 등이 이뤄지면서 1기 신도시의 매력이 상충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노후화가 되고 베드타운 인식이 강하게 자리매김하면서 1기 신도시 영광은 이제 옛날의 영광이 됐다.난개발 후폭풍 속으로
1기 신도시는 나름대로 교통망, 자족기능, 공공 기반시설, 녹지 등을 신경 쓰면서 종합적이면서 체계적으로 개발됐다. 하지만 그 이후 중소규모 택지지구들이 개발됐는데 이런 기반 시설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아파트부터 올렸다. 그러다보니 난개발이 이뤄졌다. 용인시 난개발이 심각한 이슈가 되면서 비판의 목소리까지 나오기도 했다. 또한 1기 신도시는 이제 상당한 노후화가 됐다. 1992년부터 입주가 시작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30여년이 됐다. 그런데 용적률이 200%에 이르기 때문에 재건축 수익성이 낮다. 따라서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 아울러 부실공사 논란이 있었다. 당시 분당신도시 아파트를 지을 때 강 모래가 부족하다고 해서 바다 모래를 사용했는데 제대로 세척을 하지 않으면서 염도가 구진치를 조과한 부식 아파트를 대거 준공 승인했다. 이런 이유로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재건축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리모델링으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주민이 노령화됐다는 것이다. 입주 당시 중장년층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노인이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구 유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높은 집값 문제 때문에 빠져 나가면서 주민들이 노령화가 될 수밖에 없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