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난전권, 조선 초기만 해도
4대문 안에서 관에서 허가 받은 상인 즉 시전상인만 장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만약 4대문 안에서 일반 사람들이 상업활동을 하려고 하면 시전상인들은 온갖 폭력을 동원해서 이들을 내쫓았다. 4대만 안에서 관에서 허가받지 않은 상업활동을 하는 것을 ‘난전(亂廛)’이라고 불렀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무허가 점포이다. 조선시대 초반만 해도 난전은 많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양반들도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알았기 때문에 육의전만으로도 충분히 공급을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요가 적으니 당연히 공급이 충분했고, 그래서 굳이 난전이 들어설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모내기가 도입되면서
조선 중기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행해지면서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양반들도 더 이상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소비 풍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한양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수요가 늘어나면서 시전상인만으로는 그 수요를 충족하기 힘들어지게 됐다. 이런 이유로 4대문 안에 난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전히 시전상인은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즉, 난전을 금하는 권리이다. 4대문 안에서 독점적 권리를 갖고 있던 시전상인은 온갖 폭력을 내세워 난전을 쫓아냈다. 하지만 이미 한양의 수요를 시전상인이 감당하기 힘들면서 난전은 또 다시 열리게 될 수밖에 d 없었다. 금난전권은 관이 시전상인에게 독점권을 주고 시전상인으로부터 안정적인 세수를 충당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잦은 충돌 그리고 정경유착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전상인과 난전의 충돌이 계속 이뤄졌다. 그중에 가장 골치아팠던 것이 훈련도감 등 군인들의 가족들이 난전을 열었다는 것이다. 적은 급료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군인들의 가족들이 4대문 안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전상인들도 군인들 가족들이 장사하는 것을 차마 제압하지 못했다. 그들을 제압하면 군인들이 와서 행패를 부리기 때문이다. 이에 시전상인들은 어쩔 수 없이 관의 높은 지위에 있는 관료들에게 뒷돈을 주게 됐고, 높은 지위에 있는 관료들은 뒷돈을 받는 대신 군인들 가족들의 난전을 청소해주는 역할을 했다. 금난전권이 점차 정경유착 상태가 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정경유착을 끊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신해통공
결국 정조 15년인 1791년 정조대왕은 신해통공을 발표한다. 육의전의 것 이외에 모든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다는 것이다. 시전상인들과 조정 대신들 간의 정경유착을 끊어내기 위해 신해통공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시전상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동안 육의전 시전상인들은 육의전에서 파는 것 이외에 다양한 품목을 한양 백성들에게 팔았다. 즉,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만 팔았던 시전 상인들이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품목을 금난전권으로 팔았던 것이다. 그런데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 이외에 다른 품목들은 금난전권을 폐하게 되면서 4대문 안에 난전이 마음놓고 팔게 된 것이다. 이는 조정 대신은 물론 시전상인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이것이 부정부패를 더욱 부추기는 꼴이 됐다. 세도정치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금난전권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없는 고위 관료들이 매관매직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되는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