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3) : 이병철회장의 제조업 결의
[정인준 칼럼] 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3) : 이병철회장의 제조업 결의
  • 정인준
  • 승인 2022.04.28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이낸셜리뷰] 호암 이병철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로 전시 인플레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부산 임시정부 피난시절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1951.1.10.)를 다시 세워 무역업을 계속하면서 1953년 6월에 제일제당 창립총회에서 삼성그룹 최초의 대규모 공장인 제일제당 생산 공장을 부산 전포동에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호암을 제외한 삼성물산 임직원들은 제조업을 반대했으나, 호암은 삼성물산이 더 성장하기 위해 중공업 등 거대장치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암은 1953년 8월1일(43세)에 신화폐 2천만환(1953.2.18. 100:1 화폐개혁)으로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상공부장관의 지지를 받아 18만$ 외화 배정을 받아 일본 제당시설 플랜트(다나카 기계시설 15만$)를 들여오기로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일본기술자 입국이 불허되자, 일본 기술진 자문으로 국내기술자들이 일산 25톤(공장 800평) 규모의 설탕 공장 건설을 완공했다.
1953년 설탕 수입량은 2만3,800톤으로 설탕 국내가격이 국제시세 보다 3배 비쌌으나, 설탕 생산 6개월 만에 시설을 확장, 제일제당은 3년 만에 수입대체를 달성하게 된다. (수입설탕 국내 시장점유율 : 1954년 51%, 1955년 27%, 1956년 7%) 1957년 10월에는 제일제당에 제분공장을 병설 건설을 추진하면서, 공장설비 일체를 국산으로 조달하여 1958년 4월에 준공, 밀가루 76만7,000부대를 생산했다. 1969년에 제일제당의 밀가루 생산이 국내 밀가루 생산의 25.2%를 점유한 이후 제일제당은 조미료, 식용유, 가공제품도 생산하는 종합식품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 이후 국민들은 의복용 모직은 군용 모포를 이용하고, 양복은 미군 군복을 염색해 사용했으며, 질 좋은 영국제(마카오) 양복 복지는 봉급생활자 월급 3개월 치에 해당하는 6만환의 高價였다. 호암은 국민 의복용 복지 생산방식을 면방보다는 밀수입이 성행해 국가적으로 시급했던 모직으로 결정하고 “400년 전통의 영국 모직과 경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1954년 9월15일 자본금 1천만 환으로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대구 북부에 논밭 7만평 (이후 20만평으로 확장)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일본 모방협회 다이니폰 모직기술담당 하야시 고헤이 이사에 대규모 공장 마스터플랜(일본제 기계 수입 및 일본 기술자 건설 공정 감독 구상)을 의뢰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모직물 수입대체를 위해 국영기업 설립을 통한 모직물 산업 육성을 계획하고 서독 방적기 5천추를 독일 함부르크의 스핀바우사에 설계 의뢰해 발주했으나, 모직산업의 민영화를 결정함에 따라, 호암은 일본 플랜트 도입을 포기하고 독일 방적기를 인수하게 된다. 모직공장 건설을 위해 스핀바우사 기술자 60명을 초빙하는데 년 간 인건비가 30만$ 소요되자, 호암은 1955년 초 제사, 염색, 기공, 공조 등 핵심 부문 독일 기술자 4명만 초빙하고, 나머지 공정은 국내기술진으로 6개월 만에 소모(梳毛)공장 완공, 1956년 초 방포, 염색, 기공 공장을 차례로 완공했다. 대구 시내에는 여직원 기숙사도 지었으며, 서독 방적기의 부품 소모율은 0.3%로 일제 방적기의 26%에 비해 월등한 생산성 내구성을 보여줬다. 제일모직 복지 가격은 영국제의 1/5 수준인 1만3천환으로 내려갔으며, 제일모직이 생산한 골덴텍스는 호암 스스로 양복을 해 입었는데, 외제와 맞먹는다는 평판을 받았다. 국내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이승만 정부는 1958년 1월 외국 양복지 수입을 금지했고, 1957년 10월26일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UN사령관과 함께 제일모직 대구공장을 시찰했는데, 이는 대통령의 국내 공장 최초 시찰행사로 기록된다. 제일제당 및 제일모직 경영으로 호암은 ‘巨富칭호’를 받을 정도의 큰돈을 벌었고, 시중은행 주식의 절반 소유했고, 호남비료(45%), 한국타이어(50%) 및 삼척시멘트의 대주주가 됐다. 제일제당 설립 2년 만에 호암은 한국 최고 부자, 삼성은 한국 최초의 재벌로 불리게 된다. 1950년 대 이후 삼성계열사가 납부하는 조세는 국가 稅수입의 4%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의 1등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자본을 축적하여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 선진국과 당당히 맞서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갈 길이다”고 말했던 호암의 創業정신과 기업경영에 의한 富의 축적은 당시 우리나라 기업인들에게 생산 공장 건설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