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 이건희 2대 회장은 “미국에서 시작한 반도체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고, 머지않아 다른 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 삼성전자의 도전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가 초일류 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한 도전은 한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관건이 될 것이다.
일제하 1938년 만주와 중국에 청과물, 건어물 수출하는 三星商會(대구)를 설립한 이병철 창업 회장은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취를 위하여, 과감하게 외자와 기술을 도입하여 공업화 촉진”을 주장하였으며, “자본을 축적하여,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 선진국과 당당히 맞서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갈 길이다.” 라며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을 밝히기도 했다.
1970년대 말 이후 이병철 회장(1910.2.12.-1987.11.19.)이 생전 도쿄에 머물 때 늘 만나 한·일 경제에 대해 토론하던 일본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長谷川慶太郞)는 40여 년 전 이병철회장이 “한·일 국력 격차는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벌어진 것이고, 한국은 반드시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고 말했다.
하세가와씨는 이병철 회장을 “제일모직, 제일제당, 삼성전기, 반도체, 중공업 등 전 분야에서 기술혁신을 만들어 내고, 세계 일류에 강한 집념을 보인 Innovator(혁신가)”로 평가했다.
하세가와씨는 일류기업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이병철 회장이 “일본 재계 인사에 요청한 것이 인재(人才)라며, 도시바, 히다치에서 많은 인재를 데려갔고, 삼성반도체도 인력, 장비, 부품, 원료를 모두 일본에 의존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호암의 사업보국의 시작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에 경남 의령군 정곡면의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병철은 1930.4월 입학한 와세다 대학 중퇴 후 귀국, 1936년(26세)에 부모로부터 받은 年收 300석 재산으로 마산에서 정미소, 운수회사를 운영하면서 은행 융자로 김해평야 전답 200만평을 매입 대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 전쟁 확대로 은행 대출중단, 전답시세 폭락에 따라 부채청산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사업 출발 이전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경영의 어려움을 깨닫고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호암 이병철은 재출발을 위한 사업을 찾아 만주, 베이징 및 칭다오 등 중국 상권을 조사한 후 1938년 3월1일(28세)에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와 중국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시작하였다.
1939년 3월에는 여유 자금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의 「조선양조」를 매수, 김재소를 사장에 이창업과 김재명을 공장장으로 임명하고, 책임경영제를 실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시 체제 중 국내 불황에도 불구하고 양조사업의 호황으로, 이병철은 1년 만에 대구에서 고액납세자가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 대구 조선양조 경영이 순탄한 반면, 한국경제는 북한의 일방적 송전 중단으로 인한 전기 공급 부족으로 소비재 생산이 안 되어 국민 생활수준이 태평양전쟁 이전의 절반으로 하락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경제상황을 목격한 이병철은 무역이 국가적으로 급선무라 생각해 1948년 11월(38세)에 종로 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였고, 오징어·한치를 수출하고 면사·강재를 수입하는 국제무역업을 시작하여 창사 1년 반 만에 천우사, 대한물산, 화신산업 등 경쟁 기업을 제치고 국내 무역업 랭킹 1위에 올랐다.
1950년 2월 일본 점령군총사령부(GHQ) 초청으로 일본 경제단(15명) 일원으로 참가해 패전 후 재기하는 일본 경제를 시찰한 호암 이병철은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과의 무역이 반드시 활발해 진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정인준 저자 약력
서울대학교 문리대 서양사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경희대학교 관광학 박사
행정고시 17회 합격
전 공보처 여론과장·외신협력관
전 주일 한국대사관 공보관
전 주영 한국대사관 공보관
전 그랜드코리아레저(GKL) 마케팅 본부장
원광대학교 행정언론학부 초빙교수 역임
한서대 호텔카지노관광학과 전임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