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금화군 창설
그리고 1431년(세종 13년) 5월 13일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대인 금화군을 창설했다. 금화군은 높은 종루에 올라가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 발생 시 출동해서 불을 끄는 활동을 했으며, 방화범을 잡는 업무까지 했다. 금화군은 삼베를 길게 잘라 막대기에 이어 물을 적셔 사용하는 ‘불채’와 쇠갈고리, 화재 현장에 진입하기 위한 도끼 등을 소지했다. 화재예방을 위해 돌담을 쌓고, 다섯 집 당 하나의 작은 우물을 파게 했다. 아울러 건조하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방울을 울리고 다녔다. 이는 마을사람들에게 화재에 대비할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금화군의 방울소리가 울리면 백성들은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집집마다 물을 길러 담아두는 등 화재에 대비했다고 한다. 금화군 창설 이후 한양에서는 이전과 같은 대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멸화군으로
금화군은 세조 때인 1467년 멸화군으로 확대된다. 50명의 군인들로 편성된 멸화군은 도끼와 쇠갈고리, 밧줄 등의 장비를 착용하고 현장에 출동했다. 그리고 성종 때 ‘수성금화사’라는 상급관청으로 격상했고, 경국대전에 소방업무에 대한 법제화가 이뤄졌다. 다만 화재가 나면 사람들이 일일이 물을 길어다가 불이 난 곳에 뿌리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경종 때 청나라에서 수총기가 수입되면서 근대식 소방기구의 틀이 갖춰지기 시작했다.궁궐 화재 진압 담당한 드므
한양 시내는 금화군이 담당했다면 궁궐에는 '드므'라는 것이 있다. 궁궐에 불이 났을 때는 화마(불귀신)가 드므에 담긴 물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기를 바라며 설치해둔 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화재를 진압하려고 했던 흔적은 광화문에 있는 '해치상'이다. 해치는 물의 신인데 이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이다. 관악산 정상은 마치 불타는 불과 같다고 생각해서 화기가 궁궐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해치상을 세운 것이다. 소방이라는 용어는 고정 32년 1895년부터이다. 고종실록에는 경무사는 내부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아 전적으로 한성부 5부의 경찰, 소방 및 감옥에 관한 일을 총할한다고 명시돼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