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종부법 시행
김 비서관의 발언은 한편으로는 진실이면서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 인구가 1천만명 정도인데 대략 40% 정도가 노비였다는 것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노비의 숫자가 크지 않았는데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갑작스럽게 늘어났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을 내놓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세종대왕 시절 실시한 종모법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노비를 줄여야 했다. 그래서 태종 때 고안한 것이 바로 ‘종부법’이다. 즉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자녀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평민이면 자식도 평민이지만 아버지가 노(종)이면 자식도 종이 된다. 어머니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신분이 평민이거나 비(여종)이거나 따지지 않았다. 태종이 종부법 즉 아버지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는 제도를 실시한 이유는 고려말 사정 때문이다. 당시 권문세족이 엄청난 수탈을 했다.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가 없는 반면 평민은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가 있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정부에 수탈 당하고 권문세족에 수탈 당하느니 차라리 노비가 돼서 권문세족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고려말 노비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런 증가된 노비를 양인 즉 평민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었고, 이에 태종이 고안한 방법이 바로 종부법이다. 한가지 착각하기 쉬운 것은 조선초기 양반은 신분 계급이 아니라 관료를 의미했다. 조선 후기가 돼서 신분 계급의 개념으로 확장된다. 태종은 아버지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게 함으로써 노비의 증가를 억제시키고자 했다.폐단 발생
하지만 폐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1430년 10월 ‘고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여종 이고미가 천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패륜 사건이 발생했다. 부모와 자식 사이, 부부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법이 종부법이 된 것이다. 여자 노비가 자주 남편을 바꿔 양민과 천민이 뒤섞이는 결혼이 일어났고, 어느 남편 소생인지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패륜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고미 사건이다. 아버지를 따라서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되면서 패륜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대왕은 아버지 신분이 아닌 어머니 신분을 따르는 제도 즉 종모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종부법이나 종모법이나 모두 고려말에 증가한 노비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리고 태종대와 세종대에 노비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다. 그렇게 숫자가 줄어들 수 있었던 것은 종부법과 종모법도 있었지만 ‘양천 교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여자 종과 양민의 결혼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조처와 지시를 내렸다. 즉, 양천 교혼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일천즉천 허용한 성종
사대부 입장에서는 종부법이나 종모법 모두 고민스런 대목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신분에 따라 어머니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노비의 증가를 대폭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대부 입장에서는 일천즉천이 가장 이상적인 제도(?)이다. 한쪽이 노비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죽고,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을 한다. 그때부터 훈구파들이 득세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사대부의 나라가 된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 역시 훈구파에 의해 휘둘릴 수밖에 없었고, 1485년 성종 때 경국대전에 일천즉천을 확정한다. 즉,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것을 확정한다. 그리고 조선 중기가 들어서면서 ‘양천교혼’을 유도하는 논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퇴계 이황은 아들에게 “범금(范金)과 범운(范雲) 등을 불러다가 믿을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는, 생업을 의탁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시집을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고 남겼다. 즉, 양천교혼을 허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사대부 입장에서는 노비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곧 재산을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일천즉천 폐지 주장한 현종
종부법이나 종모법에 의해 노비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일천즉천 즉, 한쪽이 노비면 자식이 노비가 되는 신분제에 대한 폐단은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양천교혼’의 풍습이 생기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됐다. 이에 1669년 현종 때 남성 노(종)과 여성 양인 사이에 낳은 자식은 ‘양인’으로 하자는 종모법으로의 복귀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당시 붕당정치 때문에 현실화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조 때 1731년 종모법이 확정됐고, 이후 불변의 법령으로 굳어졌다. 이후 순조 1년인 1801년엔 공노비가 해방됐고, 1886년엔 노비세습제가, 1894년엔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 노비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양반이 노비 성폭행하면
또한 양반이 노비 특히 여종을 마음대로 성폭행 할 수 있었냐는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경국대전 등에는 노비를 이유 없이 처벌하거나 살해하면 법적으로 처벌 대상이 됐으며 관노비를 성폭행 하려는 양반은 처벌을 받았다. 실제로 태종 이방원의 심복인 이숙번은 여종을 성폭행하려고 하다가 주인의 얼굴에 칼부림을 했다. 그러나 무죄 선고를 받았다. 또한 양반 입장에서 볼 때 노비는 ‘재산’이기 때문에 재산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노비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재산의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성리학적 사회질서에서 노비들을 성폭행하거나 함부로 하는 것은 성리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양반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치부했다. 아울러 고려시대와 달리 양반은 ‘사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비들이 분노해서 양반을 죽이려고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여종을 함부로 성폭행하거나 하는 등의 모습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