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암살되자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부 아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이 됐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수사했다. 그리고 12.12 쿠데타를 통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면서 군부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각 실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5월 12일 전두환 세력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의 집권 시나리오를 짠다. 이는 국민들의 시위와 저항을 강력히 제압하는 것은 물론 언론, 정치인 등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모방한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즉, 내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하나로 통합한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특히 5월 15일 서울역에 대학생 10만명이 결집하면서 전두환 신군부는 상당히 두려움에 떨었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존립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다만 이날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 10만명은 밤이 되자 학교로 돌아가는데 이를 ‘서울역 회군’이라고 불렀다. 당시 학생 지도부 회의가 있었는데 심재철(서울대 학생회장), 신계륜(고려대 총학생회장), 형난옥(숙명여대 총학생회장), 이해찬(서울대 복학생 대표) 등과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이수성이 참석했다. 신계륜 등은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가자고 했지만 심재철은 학교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피자고 했다. 여기에 5월 20일 임시국회가 열리기도 돼있었다. 임시국회가 열리게 되면 계엄령을 해제할 수 있기 때문에 전두환 신군부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17일 24시를 계기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임시국회가 열리지 못하게 국회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별다른 토의 없이 통과
17일 저녁 9시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모여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별다른 토의 없이 통과됐다. 이에 24시부터 비상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에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대학교 휴교령·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특히 계엄군은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했다. 5.17 비상계엄 확대를 ‘쿠데타’라고 표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한 후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했고, 2699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가택연금시켰다. 국회가 봉쇄되면서 결국 계엄령을 해제하려고 했던 신민당의 움직임은 허무하게 막을 내려야 했다.빠르게 정권 장악
다만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신군부는 당황했지만 이내 무력으로 진압한 후 내각을 조종·통제하는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는 군부의 실권을 장악했다면 5.17 쿠데타는 내각의 실권을 장악한 쿠데타였다. 국보위가 설치되면서 ‘언론 정화자 명단’이 작성됐고 기자 933명이 해직돼야 했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서는 삼청교육대가 설치됐고, 많은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난을 겪어야 했다.5.17 쿠데타에 대한 판결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신군부에 대한 처벌 요구가 잇달았다. 결국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2.12 쿠데타와 관련해서 구속기소됐는데 이 과정에서 대법원이 5.17 쿠데타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대법원은 강압에 의해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회의, 국회의원 등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배제함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