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혁명위원회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로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입법·행정·사법을 모두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박정희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서 초법적인 기구를 만들 필요를 느꼈고, 이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월 18일 설치됐다. 전두환 신군부가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그 모델이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면서 5월 18일 주요 기업인 17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됐다. 이 중 10명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각서를 쓰고 겨우 풀려났다. 5월 20일 양곡을 매점매석했다는 이유로 서울 시내 쌀 상인들로부터 6천가마의 쌀을 압수하고 서민들에게 나눠줬다. 5월 21일 이정재 및 동대문파 정치깡패 집단 화랑동지회를 체포했다. 그리고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습니다는 89년 이후 맞춤법 개정에 의해 이뤄짐. 그 이전에는 읍니다가 표준어)라는 패찰을 달고 조리돌림 행진을 했으며, 이정재는 사형을 당했다. 이후 전국에 깡패 검거령이 내려져 1만명의 깡패를 체포한 다음 국토건설단을 만들어 국토 건설 현장에 보내 노역을 시키는 등을 했다. 이것을 본받아 전두환 신군부는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5월 24일 대낮에 춤을 춘 남녀들을 옥내외 집회 금지령 근고로 체포해 징역형을 선고했고, 5월 25일 농어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리대금업을 일체 금지했다. 5월 28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 가 구성됐고, 120명의 기업인 중 30명, 공무원 32명이 부정축재에 대한 벌금 등의 처벌을 받았다.정치활동 금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된 이후 입법·행정·사법의 권한을 계속 남용했다. 우선 5월 22일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됐고, 정치활동은 완전히 금지됐다. 8월 12일에는 민정이양에 관한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1962년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 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했고, 이에 윤보선 대통령이 반발해서 사임했다. 그러자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행사하면서 대통령 겸 국무총리까지 겸임하게 됐다. 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면서 국무총리였던 내각 수반까지 독차지하면서 사실상 입법과 행정의 수반이었다. 1963년 박정희 의장이 군에 복귀한다는 혁명 공약을 번복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면서 반대를 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외교까지도 행사했는데 박정희 의장이 1961년 11월 미국 존 F.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을 방문했다.농업은행과 농협 통합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월 15일 농업과 농협의 통합을 의결했다. 1962년 3월 17일에는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했고,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했으며,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면서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 통화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부정축재자들의 자금세탁 방지와 함께 민간의 예금을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산업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국유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화교의 자금을 국유화해서 산업발전에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폐개혁 이후 화교는 한국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화교들이 주로 외식업에 종사하는 이유도 화폐개혁 때문이다. 화폐개혁은 기업 활동을 혼란에 빠뜨리게 했고, 미국의 원조가 장애를 겪는 등 문제가 속출하면서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전국경제인연합회 결성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주요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구속을 하면서 일부 기업이 소유한 은행 주식을 몰수했다. 이에 민간은행이었던 것이 국유화가 됐다. 그러나 기업인들을 구속하고 처벌하면서 경제사정은 악화됐다. 1960년 경제성장률이 7.3%였는데 1961년 경제성장률이 3.8%로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경제성장에는 기업인들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강하게 하면서 처벌을 완화했다. 그러면서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기업인들의 단체를 만들 것을 권유했고, 이에 한국경제인연합회가 결성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