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이 발명한 작품
측우기는 문종이 세자 시절 고안된 작품이다. 빗물이 고이는 부분으로,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어 강우량을 측정한다. 측우대는 측우기를 일정한 높이로 올려놓기 위해 받치던 돌로, 바닥에서 튄 빗물이 들어가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비가 올 때마다 젖어들어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지만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했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했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라고 기록돼 있다.측우기가 갖는 의미
대한민국 기상청에는 측우기를 “측우기는 조선 세종 때,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더불어 장영실이 만든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기구”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강우량 측정 기구는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정설이다. 따라서 측우기는 세계 최초 강우량 측정 기구는 아니다. 측우기라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건만 본다면 ‘평가절하’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그 물건에 담겨진 의미를 살펴본다면 측우기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물건이다. 그 이유는 측우기 발명과 함께 전국 단위 강우량 측정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비가 내리는 양을 측정하는 제도는 측우기 이전에도 있었다. 비가 온 뒤 땅에 비가 스민 깊이를 재어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방법을 위해 그릇에 빗물을 받아 그 양을 재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그 연구 결과가 그해 8월 호조(戶曹)에 보고됐고, 전국적인 우량 관측 및 보고 제도가 확정됐다. 이렇게 발명된 측우기와 주척을 중앙 천문 관서인 서운관(書雲觀)과 팔도의 감영에 나눠줬다. 즉, 전국적으로 규격화된 강우측정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경상도에는 몇월 며칠에 얼마나 비가 왔고, 전라도에는 같은 날 얼마나 비가 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됐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상을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전국적으로 규격화된 측우 가능
실제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전국단위로 규격화된 측우을 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동안에는 지방에서 임의대로 측우를 했다면 이제는 규격화된 측우를 해서 중앙에 보고를 하게 되면서 중앙에서는 그에 따른 대책 마련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농업국가인 조선에게는 가장 중요한 데이터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정에서는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다.조세 제도와 연결
이는 조세 제도와 연결된다. 세종 때 전분 6등법과 연분9등법이 적용됐다. 농사의 풍흉에 따라 세율을 9등급으로 분류하는 제도가 바로 연분9등법이다. 그해 농사가 얼마나 잘 됐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해에 얼마나 비가 내렸고, 얼마나 햇볕이 쬐였는지 등등 기상상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했다. 단지 “비가 억수로 많이 내렸다”는 보고만으로는 조정에서는 세율을 정하는데 있어 고민스런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비가 정확히 몇cm 정도 내렸는지 조정은 알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규격화된 측우기구가 필요했고, 측우기가 발명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많은 것은 현실이다. 현존하는 측우기는 1837년 공주 충청감영에 설치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다. 해당 측우기는 1915년 일본 기상학자가 일본으로 반출했고, 1971년 우리나라로 반환된 후 보물 제561호로 지정됐고, 2020년에 국보 제329호로 승격됐으며 현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