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서양의 전유물?
와인 즉 포도주는 흔히 서양의 전유물로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포도주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포도주 역사는 고려 충렬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가 보낸 포도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 세조는 고려 왕실에 포도주를 몇차례 보냈다. 다만 이것이 원나라에서 직접 만든 포도주인지 아니면 서양에서 넘어온 포도주를 고려에게 넘겨준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포도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조선 인조 대 호조판서 김세렴이 슨 ‘해사록’에 따르면 인조 14년(1636년) 대일통신부사로 대마도에 가서 대마도주와 레드와인을 마셧다고 기록했다. 하멜표류기에는 하멜 일행이 제주도 관원들에게 은잔과 쌍안경을 건네면서 스페인산 레드와인을 바쳤다고 기록했다. 18세기초 일암 이기지는 베이징 여행기인 ‘일암연기’에서 아버지 이이명이 숙종의 부음을 알리는 고부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면서 동행한 내용을 담았는데 베이징에서 가톨릭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와인을 마셨다고 기록했다.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독일인 오페르트는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샴페인 등을 조선에 가져왔다고 기록했다. 샴페인, 체리 브랜디를 조선 사람들은 선호했고, 백포도주와 브랜디 등 독주를 좋아했지만 적포도주는 떫은 맛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혼분식 정책 그리고 와인 시장 성장
우리나라에서 포도가 재배된 것은 1906년 뚝섬 원예모범장과 1908년 수원 권업모범장이다. 그리고 1918년 경북 포항에 미츠와 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아카다마’ 포도주를 빚었는데 일제치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상업용 와인은 1969년 (주)파라다이스에서 생산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이다. 이후 1970년대 본격적으로 국산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국산 와인이 생산된 이유는 당시 식량 사정이 좋지 않으면서 박정희 정권은 혼분식 정책을 장려했다. 그러면서 곡물로 빚은 술의 생산이 금지됐다. 이런 이유로 막걸리 등의 명맥이 당시에 끊겼지만 포도주 등 과일주 생산은 장려했다. 이에 농가에서는 포도주를 대안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포도주 산업에 뛰어들면서 앞서 언급한 파라다이스를 비롯해서 해태주조, 동양맥주 등이 와인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들 기업은 대규모 포도농장과 연결해서 와인을 대량 생산했다. 1977년 동양맥주에서는 ‘마주앙’을 1981년에는 진로에서 ‘샤토 몽블르’를 생산했다. 뒤이어 파라다이스에서 ‘올림피아’(이후 수석농산이 인수하여 1986년 ‘위하여’로 변경)를, 대선주조에서는 ‘그랑주아’와 ‘앙코르’를, 금복주에서는 ‘두리랑’과 ‘엘레지앙’을 선보였다. 이로써 1980년대는 와인 전성시대가 됐다. 와인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해외에서 생산한 와인은 접할 수 없었고,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말이 나돌면서 소비자들이 와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이런 국산 와인 시장이 타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수입자유화 조치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칠레산 와인 등이 전면 수입 되면서 국산 와인은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산 와인은 기업 위주가 아니라 농가 위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현재 200여개 와이너리에서 800여종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농가를 살리기 위해 국가적인 행사에서 건배주로 국산 와인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