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농지개혁법
[역사속 경제리뷰] 농지개혁법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5.24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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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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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균등한 경작권을 주기 위해 가구당 보유할 수 있는 농지를 제한하며 초과된 농지는 다른 농민에게 유상 또는 무상 방식으로 강제 배분하는 법률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제1공화국 즉 이승만 정권 때 시행했는데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이었다. 농지개혁법이 우리나라 현대경제사(史)의 중요한 변곡점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산업화를 이룰 수 있는 근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지주제가 붕괴되고, 자본가의 탄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농지를 갖게 된 농민들은 자식들을 공부시키게 되면서 그에 따라 신분상승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신분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일제강점기까지 지주(地主)제

조선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토지는 그야말로 지주(保皇)들이 차지했다. 그러다보니 자작농의 비율이 극도로 작았다.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소작농들의 반일 운동의 상당수가 과도한 소작료에 기인했다.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거둬들이는 소작료가 때로는 80%가 됐다고 할 정도로 소작농들에 대한 착취가 심했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가 일본인이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면서 수많은 토지가 적산(일제 치하의 재산)이라는 이름으로 몰수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6년 3월 5일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전격적으로 시행됐고, 남한에 북한의 소식이 여과없이 그대로 보도됐다. 이에 남한 농민들도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이 들리게 됐고, 우리도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광복 전에도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것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한국민주당의 협력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농림부 장관에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좌익계 출신 조봉암을 앉혔다. 농지개혁을 위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완전히 다른 조봉암을 앉힌 것이다.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은 한민당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왜냐하면 한민당 의원들 상당수가 지주계급이었다. 이에 조봉암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법을 내놓았고, 1949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한 농가 당 토지 소유 한도를 2정보에서 3정보(1정보당 약 3천평)로 늘어났고, 상환방식을 단기간으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했다. 또한 농지개혁에 적용된 지주들에게 국가사업 우선참여권을 부여했다. 이에 지주들이 산업자본가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이 시점을 계기로 지주들이 산업자본가로 탈바꿈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

내 땅 가진 소작농들, 6.25 전쟁 뒷받침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됐고, 5월부터는 토지장부 열람이 개시됐다. 소작농들에게도 자신의 토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으로 토지개혁이 중단됐으나 최종적으로 1967년 일단락됐다. 6.25 전쟁, 즉 한국전쟁 발발은 지주들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왜냐하면 토지가 몰수된 후 보상으로 받은 ‘지가증권’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해당 지가증권은 해당 토지로부터 몇 년간 토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행한 증서였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지주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던 지가증권을 팔아서 현금을 마련하고, 그것을 갖고 식량을 구했다. 더욱이 지주들은 대한민국이 망하면 ‘지가증권’이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낙동강까지 군대가 밀려오는 모습을 보이자 곧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가증권을 급하게 팔아치웠다. 더욱이 호남평야 소유 지주들은 북한군이 호남평야를 점령하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급하게 팔았던 반면 영남 지역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늦게 팔았다. 그러다보니 영남 지역 산업 자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반면 어느날 내 땅이 생긴 소작농들은 이제 자작농으로 바뀌게 됐다. 그런데 자신의 땅에 북한군이 들어왔다는 것은 이들 자작농들에게는 자신의 땅을 북한군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것은 학도병 등 자진해서 군대에 입대를 했고, 북한군과 싸우는 원동력이 됐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산업화의 밑바탕으로

한국전쟁 끝나고 난 후 지주들은 그야말로 무너지고, 소작농들은 자작농으로 전환되면서 ‘지주’와 ‘소작농’ 간의 대립 갈등이 사라지게 됐다. 또한 지역의 유지 역할을 했던 지주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그 자리를 빠르게 산업 자본가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주제가 소멸하면서 1960년대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시행했을 때 대지주의 저항이 없었다. 반면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전환되면서 집안의 잉여노동력은 산업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자작농으로 전환된 농민들은 자신의 땅에서 수확을 한 수확물을 팔거나 아예 토지를 팔아서 자식들의 교육에 투자를 했고, 그 자식들이 대도시로 나가서 산업의 일꾼이 된 것이다. 만약 지주나 토호들의 기득권이 그대로 유지됐다면 산업화에 상당한 애를 먹었을 것이다. 토지개혁에 실패한 나라들 대다수는 집단농장화가 됐고,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다만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야 했고, 원조물자로 인해 곡물값이 폭락하면서 쌀 가격이 생산비를 턱없이 밑도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빈농 생활을 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대도시 빈민층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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