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히키아게샤, 나리타 공항 그리고 지구방위대 후뢰시맨
[역사속 경제리뷰] 히키아게샤, 나리타 공항 그리고 지구방위대 후뢰시맨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5.27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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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아게샤 이야기를 담은 지구방위대 후뢰시맨
히키아게샤 이야기를 담은 지구방위대 후뢰시맨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해방이 되면서 많은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그때 충청도 강경경찰서를 근무하는 나카무라 기미(당시 23)라는 사람이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하냐”라고 한탄을 했다. 부모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짐을 싸고 있었고, 그는 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충청도 강경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후 일본인들만 사는 도시를 조성했다. 기존 도시의 중심에서 조선인들을 외곽으로 쫓아내고 병원과 학교 등등을 세우고 일본인들만 거주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이 대략 70만명 정도 됐다. 일본은 주로 일본 땅에서 하층민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한반도는 기회의 땅이라고 소개했고, 이에 하층민들이 기회의 땅인 한반도로 이주했다. 그들은 일본에서는 하층민이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조선 백성 위에 군림하는 군림자가 됐다. 그렇게 3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자녀를 낳았다. 그렇게 재한일본인 2~3세가 탄생했다.

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나

재한일본인 2~3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명 패망하자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당연히 태어나고 자란 곳이 한반도이기 때문에 그들은 한반도가 자신의 고향인 것으로 알았다. 이런 이유로 앞서 언급한 나카무라 기미라는 재한일본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재한일본인은 일본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일본어 공부를 하고 놀았기 때문에 당연히 조선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일본땅’인줄 알았다고 한다. 재한일본인 중 패망하자마자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이렇게 많은 조선 백성이 있었는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경성전기 사장 호즈미는 훗날 “그렇게 많은 조선인을 본건 1919년 만세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일본인 마을에서만 생활을 했을 뿐 조선인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재한일본인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한반도에 잔류하는 것이었다.

계급이 뒤바뀌어

재한일본인은 일본에서 원래 하층민으로 생활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역시 하층민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하층민으로 생활하나 한반도에서 하층민으로 생활하나 생활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남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 이름으로 개명(역창씨개명)을 하거나 한국말을 배웠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한국 사람들과 결혼을 해서 한국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물론 그중에는 일본 이름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970년대 정도 들어와서는 거의 소멸했다. 우리 땅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점차 한국사람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자신의 몸에 일본인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재한일본인은 과거 자신이 종으로 부리던 한국인의 밑으로 들어가 종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히키아게샤는 하층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사진=픽사베이
일본으로 돌아간 히키아게샤는 하층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사진=픽사베이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

히키아게샤는 일본 식민지였던 조선, 만주, 대만 등에서 거주했다가 일본 제국이 1945년 패망하자 귀국한 일본인들을 말한다. 그들 중에는 앞서 언급한대로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대~3세대도 있다. 식민지에 있었을 때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본토로 재산을 유입시키지 못했다. 그냥 식민지 땅에서 재산을 형성했다. 하지만 패망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송환선을 타야 하는데 송환선에는 현금을 1000엔 이상 소지할 수 없었고 수하물 무게도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에 히키아게샤는 빈털터리 상태로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식민지에서는 식민지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후 졸지에 하층민이 됐다. 이에 식민지 백성 위에 군림하다가 졸지에 하층민이 된 것에 대한 신세 한탄을 하고 자살하는 히키아게샤도 많았다.

도쿄 중심이 아닌 나리타 일대에 마을 형성

히키아게샤는 일본에 돌아온 후 도쿄 중심에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하층민이 도쿄 중심에서 생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히키아게샤에 대한 이지메(왕따) 현상이 극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도쿄 외곽인 현재 나리타 일대에서 마을을 형성했다. 그런데 1960년대 일본이 급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항공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하네다 공항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하기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나리타 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1966년 발표했다. 히키아게샤 농민들 입장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때 정부 말만 믿고 식민지에 가서 생활했는데 무일푼으로 쫓겨와서 겨우 자리를 잡은 상태였는데 일본 정부가 갑자기 땅을 내놓으라고 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히키아게샤 농민들은 반대 투쟁을 했다. 나리타 공항 부지 일대에 점거 농성에 들어가면서 정부는 행정대집행을 동원했다. 하지만 히키아게샤 농민들의 저항이 상당히 거칠었고, 철탑을 설치하는가하면 1978ㄴ년 3월 26일 시위대가 공항 관제탑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히키아게샤 농민들의 시위는 당시 엄청난 사회적 문제가 됐고,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산리즈카(三里塚) 투쟁이라면서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 이런 이유로 나리타 공항은 원래 발표한 계획보다 반쪽짜리 공항이 됐고, 그 사이 인천국제공항에게 동북아 허브공항 자리를 내어주게 됐다.
일본사회의 빈부격차 문제를 담은 은하철도999
일본사회의 빈부격차 문제를 담은 은하철도999

지구방위대 후뢰시맨 탄생

히키아게샤 농민들의 투쟁 소식이 일본의 사회적 문제로 거론됐고, 당시 사회주의계열과 연결되면서 학생운동으로도 이어졌다. 그런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거 방송국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진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애니메이션에 소위 빈부격차 문제 등이나 세기말 현상 등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우주전함 야마토’와 같이 패전 이후 무너진 일본이 다시 일어났다는 식의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우주전함 야마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함의 상징이었는데 그것을 우주전함 형식으로 부활시킴으로써 패전한 일본이 다시 부흥했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짱가’ ‘마징가Z’도 비슷하다. 즉, 일본 애니메이션 상당수가 일본의 부흥을 알리는 그런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히키아게샤 투쟁으로 인해 일본 사회가 빈부격차가 극심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사회주의계열 학생들이 애니메이션계 등 문화창작계에 뛰어들게 됐고, 빈부격차나 히키아게샤 관련된 메시지를 창작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은하철도 999는 철이라는 소년이 신비의 여인 메텔과 기계몸을 무료로 준다는 프로메슘에 가는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그 전반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빈부격차’와 ‘인간’이다. 히키아게샤가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만든 드라마가 있다. 바로 지구방위대 후뢰시맨이다. 먼 우주로 납치됐던 5명의 아이들이 장성해서 돌아와 후뢰시맨이 돼서 지구를 지킨다는 내용이다. 즉, 일본제국주의 시대 때 식민지로 갔다가 돌아온 히키아게샤도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창작물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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