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청어
[오늘 통한 과거리뷰] 청어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08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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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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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해양수산부가 금지체장 20cm 이하 청어의 불법 유통과 판매를 근절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오는 20일부터 7월 1일까지 12일간 집중단속을 실시하기로 했다고 8일 밝혔다. 청어는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주로 어획됐던 생선으로 꽁치와 함께 과메기의 원재료이다. 하지만 자원량이 감소한 상태에서 인터넷 업체를 중심으로 솔치, 청어멸치, 청멸 등의 이름으로 어린 청어가 판매되고 있어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청어는 동서양에서 가장 흔한 생선 중 하나로 동서양의 역사와 함께 한 생선이었다. 만약 청어가 없었다면 오늘날 주식회사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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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승리 원동력 청어

청어는 엄청난 개체수를 자랑하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에서 가장 흔한 생선 중 하나가 됐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과메기’, 일본에서는 미카키니싱, 스웨덴에서는 수르스트뢰밍, 유럽의 훈제 청어와 청어 초절임이라는 음식이 탄생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비유어(肥儒魚)’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선비를 살찌우게 만드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워낙 많이 잡히기 때문에 값이 쌌다. 따라서 가난한 선비들도 청어를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서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라는 뜻이 된 것이다. 현대에는 등푸른 생선하면 떠오르는 것이 ‘고등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청어’를 떠올렸다고 할 정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는 한산도로 피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 밑에 가면 왜군들에게 죽지는 않는다는 말에 조선 팔도에 있던 백성들이 한산도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일대에 둔전을 경작해서 피난민을 먹이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해졌다. 이에 병사들을 동원해 청어잡이를 하면서 군사들과 피난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청어는 임진왜란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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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는 청어 위에 세워진 회사

서양에서도 청어는 주요 단백질 공급어류였다. 문제는 청어가 무슨 이유인지 이동이 잦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유럽 도시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기도 했다. 바이킹은 과거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드 반도에 한정돼서 살았던 민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8~11세기 사이 잉글랜드, 프랑스 해안가는 물론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 근교, 러시아 부근, 이베리아 반도, 더 나아가 아메리카까지 정복을 했었다. 그런데 바이킹이 정복활동을 벌인 이유가 청어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10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드 반도에서 청어가 풍년이 들면서 잉글랜드 습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11세기 다시 청어가 귀해지기 시작하면서 잉글랜드를 습격했고, 결국 영국 왕실이 노르만족에게 넘어가기도 했고, 프랑스에서는 노르망디 공국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런 청어가 13세기 초반 발트해 연안의 도시에 나타나면서 발트해 연안에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어시장이 형성되면서 상인들은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동맹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한자(Hansa)동맹이다. 한자동맹은 200여년 동안 유럽의 경제패권을 장악했는데 그 밑바탕에는 청어가 있었다. 그런 청어가 갑작스럽게 북해로 이동하면서 한자동맹은 급격히 쇠퇴를 했고, 네덜란드가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어부들과 상인들은 청어잡이와 판매로 막대한 부를 얻기 시작했고, 그 부를 더욱 불리기 위해 투자를 하기 시작하면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수십개의 동인도 회사가 형성됐다. 그리고 그 동인도 회사는 어부들과 상인들에게 투자를 받았다는 증명서를 발행했는데 그것이 주식회사의 시초가 됐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주식회사는 청어 뼈 위에 세운 회사라는 별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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