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저 호황과 중동 개발 붐
전두환 정권 때 3저 호황이 발생했다. 정확히 1986년부터 3저 호황이 발생했다.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로 이때 높은 경제성장을 보였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황폐화됐지만 6.25 전쟁을 기반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하면서 미국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면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 1위 국가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자 미국은 엔화의 가치를 대폭 높이고 달러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추는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 엔고 현상이 발생하면서 일본제품에 대한 가격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수출이 어려워졌고, 반면 우리나라의 원화는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면서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로 인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3저 호황이 발생했다. 그러다보니 기업들마다 ‘인력난’을 겪었고, 특히 대학생들이 대거 직장인 특히 화이트칼라로 유입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학생들은 민주화 요구를 하면서 끊임없이 학생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직장인이 된 것이다. 아울러 1980년대 초 중동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중동으로 많은 근로자들이 나가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서구유럽 문화가 점차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1980 칼라TV 시대와 1980년대 중반 비디오 플레이어 보급이 중동 개발 붐과 합쳐지면서 중동에 파견됐던 근로자들이 서구 유럽 문화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국내에 유입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서 접하지 못했던 많은 서적들이나 영화 노래 등등을 우리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유럽의 사상과 정치 체제에 대한 이론 등도 일반 국민들이 접하게 됐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유럽의 사상이나 정치 체제 이론 등은 학자들이나 접할 수 있었던 내용이지만 중동 개발 붐을 틈타 근로자들로부터 서구 유럽 문화가 전파되면서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반인들도 접하게 된 것이다.81.3%가 중산층으로 생각
3저 호황이 일어나면서 당시 우리 국민 81.3%가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월급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조금만 열심히 일하면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으며, 조금만 일하면 자가용 시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이런 희망은 주인의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더욱이 당시 직장은 평생직장이었다. IMF 이후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한번 입사한 회사는 평생 다녀야 하는 회사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주인의식이 상당했다. 이런 주인의식은 정치형태로는 ‘민주주의’ 사상을 뿌리 내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것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것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화이트칼라에 심어주기 충분했다. 아울러 그 이전에 중동 근로자들로부터 서구 유럽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이른바 민주주의 사상도 함께 유입됐다.6월 10일 퇴근하는 화이트칼라에 불 당긴 사건들
6월 10일 즉 6.10 민주화운동이 학생이나 재야운동가들 이외에 화이트칼라들 즉 넥타이부대가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3저 호황과 중동 개발 붐에 따른 서구 유럽 문화가 우리에 유입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일어났던 몇가지 사건이 화이트칼라의 불을 당기게 만들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내렸다. 우선 경적을 울리는 모든 차량운전자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아넣겠다는 뉴스를 보도했고,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 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수업과 조기 퇴근 등의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조기 퇴근은 직장인들에게는 시위를 참가하게 하는 그런 촉매제 역할을 했다. 게다가 지하철 역시 무정차로 통과하게 되면서 교통대란이 불가피하게 됐다. 당시 시대상을 그린 만화 ‘100℃’에서는 실제로 직장인들이 “시위를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라고 조롱도 했다. 그만큼 조기퇴근과 지하철 무정차 통과는 넥타이 부대를 탄생시키게 만드는 요소가 된 것이다. 더욱이 그날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한국팀과 이집트 간의 축구경기가 벌어졌는데 경기도 도중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에 날아들었다. 이집트 선수들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면서 주심은 해당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면서 몰수무를 선언하고 경기를 종료시켰는데 공중파를 통해 전국적으로 생중계가 됐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 넥타이 부대가 시위에 가담했다는 것은 경찰들에게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당시 전두환 정권은 서울의 경우 경찰력으로만 충분히 시위를 진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가 됐지만 경찰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쉽지 않았다는 보고도 있었다. 아울러 최루탄이 동이 나면서 경찰로 진압하는 것에 한계를 봉착하기 시작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