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행위자로 얼룩진 인상
사건 당시 47세인 이팔국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가 1958년 전처와 결혼한 후 4남매의 아버지가 됐다. 하지만 1969년 전처가 사망 후 무직으로 있으면서 가정부를 성폭행한 전력이 있었다. 또한 일정한 직업 없이 허가업무 등의 알선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1973년 9월 다방을 경영하던 사건 당시 43세 이숙자와 만나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팔국이 실직 상태에서 범행 때까지 놀고 있었기 때문에 이숙자는 다방을 경영하면서 이팔국 전처 소생 4남매 등 6식구의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이런 이유로 이숙자와 이팔국의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런 도중 이팔국은 이숙자의 동의 없이 몰래 혼인신고를 했다. 이에 이숙자는 이혼을 요구했고, 이팔국은 부부싸움 끝에 순간적인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시신 유기 과정 ‘너무 끔찍해’
그리고 아내의 시신을 유기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끔찍하다. 지면으로 차마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기 때문에 기술은 생략한다. 날이 밝아오자 이팔국은 온 집안에 소독약을 뿌려 탄내를 없앴고, 전처 소생 아이들에게 엄마는 새벽에 집을 나간 후 일절 소식이 없다고 하라고 입막음을 시켰다. 그리고 연탄재에 섞은 뼛가루를 비닐봉지에 담고 시멘트 부대로 싸 집에서 1km 떨어진 페인트 상황 옆 한 쓰레기 하치장에 갖다 버렸다. 김칫독에 묻어둔 사체 일부를 성균관대학교 옆 쓰레기장에 버린 후 태연히 산책을 했다. 이후 이숙자의 딸이 자신의 어머니가 보이지 않자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이팔국이 수상하다고 밝혔다. 그 무렵 종로구 명륜동 한 동네에서 환경미화원이 쓰레기봉투를 수거하다가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를 발견했다. 국과수에 뼈조직 부검을 의뢰했고, 부검 결과 훼손된 사체는 사람의 뼈로 밝혀졌다. 경찰은 전처 소생 및 의붓자식들까지 모두 소환시켜 대질심문을 벌였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니 역겨운 냄새가 났는데 아버지가 “벌레가 끓어 그런다”면서 소독을 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아이는 뭔가 태운 냄새와 정육점에서 나는 냄새가 섞여서 났다고 진술했다. 이에 이팔국이 정육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형사들은 이팔국을 범인으로 지목했다.수사하던 형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오늘날에는 진술을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하지만 당시에는 보통 펜으로 진술조서를 받았다. 이팔국은 범행 당시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를 했는데 사건 담당 형사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줄담배를 피우고 펜을 내동댕이쳤다. 그만큼 시신 유기 방법이 너무 잔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훗날 사건 조서를 읽었던 사람들도 구토를 할 정도로 너무 끔찍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엽기적으로 사체를 유기한 사례라고 할 정도이다.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 8부 심훈종 재판장은 이팔국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범행은 우발적이었지만 뒤처리가 매우 극악무도했다는 것이 이유다. 당시 판결에는 “피고인의 범행 행위는 우발적이었지만 그 뒷과정에서 사체를 훼손하는 등 지극히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인명을 천시하여 피고인의 행위는 용서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당시 이팔국 변호인은 범행 당시 기억상실 등 심신상실 상태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6.25 때 부상으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정신감정을 요청했지만 기각됐다. 이팔국 측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 및 상고했지만 기각 당했다. 그리고 1977년 11월 처형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