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찾을 수단이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당시 추산된 이산가족 수는 1050만명 정도였다. 1980년대 초 대한민국 인구가 4천만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네 명 중 한명은 이산가족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징용에 끌려가서 이산가족이 됐고, 6.25 전쟁 피난길에 이산가족이 됐고, 추석이나 명절의 민족대이동 중에 이산가족이 되는등 이산가족의 사연은 다양했다. 물론 그중 6.25 전쟁이 가장 비중을 크게 차지했다. 지금은 인터넷 등이 발달해 있지만 당시에는 이산가족을 찾을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가장 많이 이용한 수단이 신문 광고였다. 하지만 당사자라고 해도 신문 광고를 계속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산가족을 찾는 것이 제한적이었다. 주민등록번호로 찾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현재의 주민등록 체계는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주민등록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에 그 이전에 발생한 이산가족은 찾을 길이 쉽지 않았다. 가족관계증명서 등으로 찾으면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호적 제도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상당부분 불에 타면서 이산가족이 발생해도 찾을 길이 만무했다. 따라서 이산가족들은 가족을 찾고 싶어도 마땅한 수단이 없었었다.컬러TV 등장
1980년 컬러TV 등장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의 위력을 만들게 하기 충분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한 마을에 1대만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각 가구마다 1대씩 TV브라운관이 있을 정도가 된 시점이 1980년대 초반이다. 즉, 이제 누구나 TV 앞에서 TV를 시청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것은 TV를 통해 이산가족을 찾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산가족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루종일 TV앞에서 TV를 시청해야 하고, 당시 시청률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1시간 30분짜리 단발성 프로그램으로 출발
당초 KBS는 휴전 30주년을 맞이해 1시간 30분짜리 단발성 프로그램으로 기획을 했다. 그 이전에도 KBS는 소련령 사할린, 중공령 북간도 등의 동포들과 이산가족 라디오 상봉을 주선해왔는데 이것을 TV에서도 단발성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6월 30일 밤 9시 뉴스 등 정규 프로그램이 끝난 10시 15분 생방송이 시작했다. 사전에 신청 받은 이산가족 중 150여명을 공개홀에 모셔서 사연을 소개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각 지역국을 연결해서 지방 소재 이산가족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산가족 사연을 접수하자는 기획을 했다. 하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방송이 시작하자마자 이산가족들의 사연 접수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당시 진행자는 “야간통행금지도 없어졌으니 방송국으로 와서 사연을 접수하라”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TV를 시청하던 이산가족들은 KBS로 몰려갔다. 밤 11시쯤 KBS에는 이산가족 사연자들이 넘쳐나면서 12시 15분에 끝내기로 했던 방송을 끝낼 수 없었다. 이에 새벽 2시 30분까지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4시간 만에 신청자는 2천명이 몰렸다. 전화접수는 아예 마비가 될 지경이었다. 날이 밝기 전 1만명의 이산가족들이 KBS 본관 앞으로 몰려왔다. 결국 이틀째인 7월 2일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생방송을 계속해 나갔다. 다만 7월 15일까지는 정규방송과 이산가족 생방송을 번갈아 가면해 해오다가 7월 15일부터 상시 편성 생방송 체제로 들어갔다.여의도광장은 만남의 광장
이산가족 신청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KBS는 접수받는데 한계를 느끼게 됐다. 이에 접수를 받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KBS 본관 건물 벽과 기둥에 이산가족들의 사연이 담긴 벽보가 붙기 시작했는데 처음 시작한 사람은 곽만영씨로 알려졌다. 벽보들로 KBS가 도배되면서 더 이상 붙일 곳이 없자 현재 산업은행이 들어선 땅에 ‘만남의 광장’을 조성했다. 급수대, 의무시설, 이동 전화, 체신부와 철도청 출장소, 미아보호소 등이 있었다. 그러면서 여의도광장은 만남의 광장이 됐다. 여의도광장은 벽과 바닥에 이산가족 신청사연으로 도배했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벽보를 붙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산가족의 고향 지역으로 나뉘어 붙여지기 시작했다. 이에 평안도, 함경도 등등으로 지역을 구분해서 벽보를 붙였고, 이산가족들은 고향 지역으로 가서 벽보의 사연을 일일이 들여다봤다. 비가 오는 날에는 벽보가 찢겨져 나갈까 걱정이 된 이산가족들은 벽보 앞에서 노심초사해야 했고, 이웃 벽보의 주인이 없을 경우 벽보를 대신 관리해주는 등 따뜻한 정이 넘쳐났다. 전국은 물론 해외에 있는 이산가족들도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의도로 몰려갔고, 벽보를 하나하나 일일이 쳐다보면서 내 가족의 사연이 있는지 읽어내려갔다.설운도 스타 탄생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에는 삽입곡이 들어가 있는데 초기 타이틀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였다. 그런데 상시 편성 이후 타이틀이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으로 교체된다. 당시 26세였던 설운도는 무명의 세월이 길었다. 그런데 소속 회사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을 보고서는 ‘아버지’라는 곡을 개사해서 방송국에 가져다 줬는데 그것을 발탁한 것이다. 설운도 소속 회사가 훗날 이야기하기를 설운도가 당시 스케줄이 비어 있어서였다고 했다. 덕분에 설운도는 일약 스타가 됐다. 그리고 ‘잃어버린 30년’은 최단 기간 히트곡이 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왜냐하면 발표된지 하루도 안돼 히트곡이 됐기 때문이다.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이 진행되면서 전세계가 해당 방송을 주목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주요 매체에서 토픽으로 다뤘다. 이에 1983년 9월 6일부터 사흘 간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열린 제6차 세계언론인회의에서 ‘1983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됐고, 1984년 2월 17일 가봉에서 열린 제24차 골드 머큐리 세계평화협력회의에서 방송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골드 머큐리애드 호너램 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영국 그리니치 대학교에서까지 방송용 교재로도 사용됐다. 결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방송가에서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식의 최장 기간 생방송 프로그램이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는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