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의 눈물 담긴 감귤
우리나라에 귤이 재배된 것은 삼국시대 이전이다. 탐라지에 따르면 백제 문주왕 2년(476년) 탐라국에서 지역 특산물로 귤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문종 6년(1052년) 탐라국에서 세금으로 받아오던 귤의 양을 늘린다는 기록이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보다 상세한 기록이 있다. 태조 원년부터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8년(1426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에 유지와 감자를 심게 했고, 세종실록에는 감귤은 종묘에 제사 지내고 빈객을 접대할 때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고 기록했다. 또한 귤을 왕실 전용 온실에서 길렀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총애하는 후궁에 귤을 줬고, 문종은 집현전 학사에게 귤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매년 ‘황감제(黃柑製)’라 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감귤을 하사하고 치른 시험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감귤은 제주도민의 눈물이 배어있는 공물이다. 귤나무에 맺힌 열매 하나하나를 기록해서 그 기록만큼 귤을 바치라고 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게 되면 수확이 반토막이 되고, 또한 한양까지 가는 도중 썩기도 했다. 이에 제주도민으로서는 감귤은 그야말로 고통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제주도민 중 일부는 귤나무를 없애려고 했다. 다만 이때 감귤은 현재의 품종이 아니라 토종 감귤 품종이다. 크기가 작고 당도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중국 저장성 원저우 밀감이
현재 우리가 먹는 감귤 품종은 중국 저장성의 원저우 밀감인데 일본 규슈에서 씨없는 감귤로 개량된 품종이 제주에 심어진 것이다. 즉, 조선시대 감귤과는 완전히 다르다. 1911년 프랑스 출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에밀 타케 신부가 일본 아오모리에서 선교하는 위르뱅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 묘목을 보냈다. 이에 답례로 받은 밀감 묘목 14그루를 서귀포시 서홍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면형의 집’에 심었다. 타케 신분의 밀감이 잘 성장하는 것을 본 일본인이 1913년 제주도에서 대량 상업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때도 농가에서는 재배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는 4.3 사건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제주도민으로서는 감귤 재배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박정희 지시에 의해
그러다가 1964년 2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제주도로 연두순시를 했고, 감귤을 중점적으로 키우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1965년부터 감귤심기 붐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 농림성으로부터 감귤 묘목을 수입해 농가에 보급했다. 1990년 중반에는 2만 5천여 ha에 감귤 60만톤 생산에 이르면서 현재까지 이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때 귀했던 감귤이 이제 전국민이 사랑하는 그런 과일이 됐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로 인해 제주도에서만 재배됐더 감귤이 이제 전국단위로 재배되기에 이르렀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