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이후 호황 누린 일본제국주의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국들의 혈전을 벌이면서 중국 무역을 독점하게 됐다. 나리킨이라는 벼락 부자가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일본제국은 러일전쟁으로 한반도를 먹은데 이어 중국 만주로 진출한 상태에서 중국과 서방세계와의 무역 독점을 하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부자가 탄생하는 등의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유럽국가들이 무역 전쟁에 뛰어들면서 쌀 소동이 발발했다. 1918년 7월 22일 일본 도야마현 우오조항에 정박한 선박 이부키마루에 훗카이도로 내갈 쌀을 실으려고 할 때 주부들이 선적을 중단시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1차 세계대전 내내 한섬(150kg) 당 10엔 가격을 유지해오던 쌀값이 그해 초반부터 가격이 뜀면서 30엔으로 올랐다. 수요 증가와 전쟁 특수로 인한 호황으로 쌀 소비가 늘어나는데 비해 농가 인구가 줄어들면서 수급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제국 군대가 공산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시베리아로 출병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에 따른 쌀값 상승이 이뤄질 것이라고 판단한 미곡상들이 매점매석을 한 것이다. 이날 쌀 소동은 결국 연인원 200만명이라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내각 총사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일본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제국은 쌀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조선땅에 산미증식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쌀 생산량을 늘어났지만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절반으로 떨어졌다. 쌀 소동은 농민의 숫자를 더욱 감소시키게 했으며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일본 농민의 숫자는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공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이 크게 늘어난 가운데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이 전파되면서 노동쟁의가 빈번했다. 여기에 중국이 일본제국 상품 배척 운동이 일어나면서 중국 무역에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역시 대공황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미국 수출 역시 감소를 하기에 이르렀다.금해금 정책 등 혼란 거듭
여기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1928년엔 금해금(金限售解禁)을 결정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는 등 국제사회는 그야말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 시스템은 신속하게 운용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제국 헌법에 따르면 정책 결정시 모든 장관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일본 국민들은 ‘무기력한 정부와 싸움질만 하는 정당’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이는 일본 군부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일본 군부 내에서 히로히토 일왕에게 절대권력을 줘야 한다는 황도파 등 극단주의 파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정부는 점차 황도파의 목소리가 담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 국민들 역시 극단주의로 경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군부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1940년쯤 군이 사실상 정부를 통제하기에 이르렀고, 히로히토 일왕의 신격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미국이 갑자기 일본에 대한 원유 수출을 중단하면서 일본 경제는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일본 군대를 유지시킬 석유가 모자른 상태에 이르면서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