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19일 로마대화재 발생
[역사속 오늘리뷰] 7월 19일 로마대화재 발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7.19 0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쿼바디스 한 장면.
영화 쿼바디스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64년 7월 19일 로마대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80km나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에 있었는데 대화재 소식을 듣고 전차를 몰고 와서 화재 수습에 나섰다. 로마대화재의 원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5일 동안 불탔고, 네로 황제는 로마 재건에 나서야 했다. 우선 로마 시민의 불만을 잠재우는 방법으로 ‘기독교인’의 처형을 했고,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왜 불이 났나

고대 로마에는 ‘인술라(insula)’라고 불리는 다세대 주택이 있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아파트다. 나무와 벽돌, 진흙 그리고 원시적인 시멘트로 만들어졌는데 10층이 넘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었다.화재 문제 때문에 공동 화덕을 두거나, 공용 식당에서 빵과 음식을 사먹어야 했고, 배설물은 항아리에 갖고 나와서 하수도에 버려야 했다. 아직까지 로마대화재의 원인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인술라의 무단 증축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는 자신이 임대하던 인술라가 노후화 되어 붕괴되자, ‘더 높은 인술라를 지어 돈을 더 벌 수 있게 되었군!’이라고 하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화재 문제 때문에 공동 화덕을 1층에 두거나 공용 식당에서 빵과 음식을 사먹는다고 해도 난방 문제, 야간 조명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언제든지 화재가 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번 화재가 나면 불이 난 층의 위쪽 층은 대피할 방법이 없었다. 시인 유베날리스는 자신의 친구에게 하룻밤만이라도 좋으니 붕괴나 화재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자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며, 로마를 떠나야 할지 고민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불법 증축까지 하면서 이웃 인술라로 화재가 번지는 것이 당연했다. 한번 화재가 일어난다면 주변 인술라로 쉽게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네로 황제./사진=픽사베이
네로 황제./사진=픽사베이

80km 달려온 네로 황제

아직까지 로마대화재의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네로 황제는 80km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에 있었다.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네로 황제는 로마로 전차를 타고 복귀했다. 그리고 대화재 진화에 진두지휘를 했다. 또한 피난민이 발생하자 궁전을 개방해 시민들의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만약 네로 황제가 직접 대화재를 일으켰다면 네로 황제의 정치적 생명이 끝나는데 그 정도 어리석지는 않았다. 다만 네로 황제가 직접 노예를 시켜 불을 지르고 궁전에서 하프를 튕기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바디스’의 소재가 되면서부터 정설로 굳어졌다.

범인으로 기독교인 지목

로마대화재가 발생하면서 그 원인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분노가 극도에 달했다. 하지만 그 분노의 끝은 네로 황제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었다. 당시 국가행사에 “기독교도로써 이교의 신들에게 바쳐지는 축제에는 참석할 수 없다”며 불참하고 군대에도 “기독교도는 이 세상 군대의 병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대의 병사다”면서 불참을 한 것이다.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인식이 좋지 않았다. 대화재 당시에도 로마 시민들이 신전에 가서 울부짖었지만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에 분노한 시민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 황제는 로마대화재의 범인으로 기독교인들을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쿠오바디스에 나오는 것처럼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들을 사자들 밥으로 주는 등 처형을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콜레세움은 네로 황제 사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지은 건축물이었다. 로마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는 등 박해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처형에 끔찍한 방법을 사용한 것도 사실이다. 오죽하면 처형 장면을 구경하던 시민들도 구토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탈로 지스몬디가 1923년 발굴한 인술라의 복원도./사진=Roman Architecture and Urbanism
이탈로 지스몬디가 1923년 발굴한 인술라의 복원도./사진=Roman Architecture and Urbanism

인술라 규제 강화

로마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는 인술라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를 단행한다. 우선 가연성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전세계 통틀어 가연성 재료를 건축물에 사용하지 못하게 한 사람이 네로 황제가 처음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이다. 또한 인술라를 7층 이상 증축하지 못하게 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술라가 10층 이상으로 증축을 한 경우가 발생했다. 하지만 현대와 다르게 당시에는 원시적인 시멘트를 사용해서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에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시멘트 사용을 줄이고, 목재 사용을 늘렸다. 즉, 아래층은 시멘트로 튼튼하게 짓지만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목재가 많이 사용됐다. 목재가 많이 사용됐다는 것은 화재에 쉽게 노출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화재가 5일 동안 타들어 간 것도 목조 고층 건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로 황제는 가연성 재료 사용을 금지하고, 7층 이상 인술라를 짓지 못하게 한 것이다.

화폐 개혁

네로 황제가 로마대화재 이후 화재 복구를 위해 많은 재정을 투입했다. 우선 불에 타 소실된 팔라티노 황궁을 대신할 궁전을 짓기로 했다. 또한 그의 양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재건하기로 했다. 여기에 네로 황제가 심한 사치를 했다. 이런 이유로 재정은 곧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결국 네로 황제가 화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새로운 통화 제도를 발표했는데 새로운 아우레우스(표준금화)의 무게를 예전보다 10% 가량 줄이고 데나리우스(표준 은화)의 함량 역시 비슷하게 줄였다. 이같은 화폐개혁은 이후 황제들도 도입하면서 심지어 금화에서 금의 비중이 10%도 채 안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즉, 화폐의 가치가 바닥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 경제를 붕괴시키고 봉건제 국가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