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
[역사속 경제리뷰]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7.19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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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는 닛폰 애니메이션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일환으로 일본 TV 시르지 플랜더스의 개 후속작인 애니메이션이다. 원래 제목은 엄마 찾아 삼천리이지만 국내에서는 삼천리 자전거가 떠오른다면서 삼만리로 바꿨다. 또한 일본에서 리(里)와 우리나라의 리(里)는 10배 차이가 난다. 즉, 우리나라에서 삼만리가 일본에서는 삼천리가 되는 셈이다.
원작은 이탈리아 아동 문학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 실려 있는 단편 ‘아펜니노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이다. 이것을 일본이 차용해서 엄마 찾아 삼만리 만화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줄거리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사는 소년 마르코의 엄마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몸도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정부 일을 하러 떠났는데, 편지도 돈도 꼬박꼬박 보내오던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어머니를 찾아 어린 나이에 혼자서 먼 여행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여행담이다. 현재 GDP 상황만 놓고 비교했을 때 이탈리아 소년이 일자리 찾아 아르헨티나로 떠난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현재 GDP 상황만 놓고 볼 때 아르헨티나는 약 4천181억달러로 세계 32위이고, 이탈리아는 약 2조 달러로 세계 8위이다. 즉, 아르헨티나보다 이탈리아가 더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당시는 이탈리아보다 아르헨티나가 더 부국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독립했지만

원작자인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는 1908년 사망했다. 따라서 엄마 찾아 삼만리는 1800년대 후반의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담겨있다. 이탈리아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라다가 1820년대부터 통일운동을 했고, 1870년에 통일 한다. 하지만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통일을 방해하기 위해 이탈리아 땅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전국토가 전쟁터로 변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이 이탈리아 땅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부자 나라에 돈을 벌러 나간 이탈리아 국민들이 많았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로 이민온 사람들의 출신 국가를 살펴보면 이탈리아가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때 대부분 이주한 것이다.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주인공 에바 페론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주인공 에바 페론

상반된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가 이탈리아보다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했다. 하지만 정쟁, 내란, 혁명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아르헨티나는 오랜 내전이 끝나면서 원주민 영토를 향한 정복 및 식민에 착수한다. 1800년대 후반 대규모 정복 사업으로 아르헨티나 영토는 2배로 늘어난다. 그러면서 농업과 목축업에 쓸만한 땅을 확보한다. 넓은 토지와 초원 등은 목축업을 크게 발달시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냉장기술이 개발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도축을 해서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팔 수 있게 되면서 신흥 부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여기에 해외 자본 특히 영국과 프랑스 자본이 유입되면서 최초로 근대적 공장이 세워졌고, 남미에서는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됐다. 이런 경제 부국인 아르헨티나와 경제적 후진국이었던 이탈리아가 대비되면서 이탈리아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머나먼 타국땅인 아르헨티나로 가게 되면서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사진=픽사베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사진=픽사베이

아르헨티나는 왜 몰락했는가

그런 아르헨티나가 몰락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의 주인공 후안 페론 대통령의 아내 에바 페론이 떠오를 정도로 경제 부국 후에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게 된다. 1946년 대통령이 된 페론은 사회적 정의, 경제적 자유, 정치적 독립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급격한 임금 인상, 무상복지 확대에 나선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1958년 이후 스물두차례 구제 금융을 받았다. 페론 대통령은 군부 쿠데타로 1955년 물러나게 된다. 그런데 페론 대통령이 1973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1974년 고령으로 사망하고, 이후 아내였던 이사벨이 세계 최초로 여성 대통령에 올랐지만 1976년 또 다시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군부는 페론 정권을 포퓰리즘 정권이라면서 페론주의르 배격하고 급격한 중공업 육성 정책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군부는 국가 재산을 매각해서 자기 뱃속을 채우기 급급했다. 그러자 국민의 반발이 극심해지고, 이에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에게 무참하게 참패를 다하면서 민간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1989년 페론주의를 앞세운 카롤로스 메넴이 당선되면서 복지정책과 물가를 잡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선 이후 페론주의와는 정반대인 신자유주의를 채택한다. 그리고 1992년 1월 1일자로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서 결국 아르헨티나 경제는 몰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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