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생들의 반발, 영남만인소
조선시대는 왕조국가이지만 조정의 시책이 잘못됐을 때 유생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하면서 상소를 했다. 유생들의 상소는 16세기 전반까지 성균관 등이 주도를 했지만 16세기 중엽부터 지방에 있는 양반들이 가세하면서 유생들의 집단 반발이 거세졌고, 집단상소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수백명이었지만 그 규모가 커지면서 18세기 들어서 1만명의 유생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했다. 흔히 ‘만인소’라고 하는 것이 바로 1만명의 유생이 상소를 했다고 해서 만인소로 불렸다. 그리고 만인소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주로 영남 지방 유생들이라고 해서 ‘영남만인소’로 불리었다. 1792년 정조 16년 ‘이우’(李㙖)를 필두로 해서 영남 유생 1만 57인이 사도세자 신원을 위해 상소를 한 것이 영남만인소의 기원이다. 1823년 순조 23년 ‘김희용’(金熙鏞)을 위시한 경기·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 지방의 유생 9,996인이 서얼 차별 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같이 해서 조선시대 7차례 만인소가 이뤄졌다. 구한말에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면서 만인소가 빈번하게 이뤄지면서 영남만인소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에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UNESCO)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조선시대 왕들에게 가장 무서운 집단시위가 유생들의 상소였다. 그 이유는 상소에는 반드시 비답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1만명의 상소에 일일이 비답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임금으로서는 곤혹스럽다고 할 수 있다.성균관 유생은 집단 파업으로
임금에게 또 다른 무서운 존재는 성균관 유생들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그릇된 정책이나 사회 문제에 대해 집단시위에 나서기 일쑤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을 했고, 오늘날 학생회와 같은 자치기구인 재회가 있었다. 유생들은 그릇된 정책에 대해 자신의 의사표시로 처음에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상소로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집단행동으로 나섰다. 거부하거나, 학생들이 미리 짜고서 다 같이 공부방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를 ‘권당(捲堂)’이라고 한다. 권당이 발생하면 대사성(성균관 정3품)이나 동지관사(성균관 종2품)은 유생들을 소집해서 그 연유를 묻고 타일렀다. 하지만 이렇게 했는데도 유생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동맹휴학인 공관을 했다. 공관이란 성균관을 텅텅 비게 한다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동맹휴학이다. 세종 30년인 1448년 무소전文昭殿, 태조의 비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 서북 빈 땅에 불당을 건립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해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관에 들어갔다. 이에 세종대왕은 국문(鞠問)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의금부, 의정부, 육조 관원 등이 적극적인 간청으로 국문을 면하게 됐다. 중종 때는 조광조가 옥에 갇히면서 상소문으로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성균관을 나서서 왕으로 직접 항의하기 위해 궁궐로 갔다. 이에 군졸이 막아서면서 그에 따라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다.백성들은 격쟁으로
백성들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격쟁을 이용했다. 물론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이는 상징적인 제도에 불과했다. 신문고가 절차의 복잡성 때문에 백성들로서는 자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격쟁을 이용했는데 격쟁이라는 것이 꽹과리를 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임금이 행차를 했을 때 꽹과리를 쳐서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것이다. 특히 정조대왕은 4천 4백여 건의 민원을 상언과 격쟁을 통해 이뤄졌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조대왕이 능행을 자주 갔기 때문이다. 정조대왕이 능행을 비롯해 궁궐 밖으로 행차한 횟수가 100여회를 훌쩍 넘는다. 단순히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행차가 아니라 백성들의 민심을 듣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조대왕이 능행을 한다면 격쟁이 이뤄졌다. 전국에 있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능행 소식을 들으면 능행길로 나아가 꽹과리를 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