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진주성 참패, 위기의 이순신 장군 돌파구는
이때 2차 진주성 싸움이 있었는데 조선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이제 일본 육군이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택한 것은 바로 한산도에 전라좌수영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라도에 있는 많은 섬들을 이용해서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섬들 경작을 통해 군량미를 확보한다면 전라도 전역이 왜구들에 의해 점령된다고 해도 일단 전라좌수영의 군량미는 섬을 통해 보급을 확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군량미’ 확보를 걱정했다. 이는 난중일기에 계속해서 나와 있는 내용이다. 군량미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해 선조에게 진상하는 군량미에 대해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1594년 3월10일 장계에는 “무려 1만7000명입니다. 한 명당 아침저녁 5홉씩 나눠준다면 하루 100여 석입니다”면서 조정에게 진상하는 군량미를 깎아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더욱이 한산도 대첩 이후 피란민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여수 전라좌수영에서 이들을 감당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일단 왜군들이 침입해 온다면 군영과 백성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따라서 백성들은 후방으로 빼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군영을 차라리 전진 배치하는 식으로 선택을 한 것이다.공도(空島) 정책의 폐기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장계를 보냈는데 핵심은 ‘남해안 섬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게 해달라는 것과 연안 고을의 군량과 군사 조달권을 수군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남해안 섬을 개간한다는 것은 ‘공도(空島)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었다. 공도 정책은 섬을 비운다는 뜻인데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왜구의 피해가 있었기 때문에 섬에 주민들이 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이를 폐기하고 섬을 개간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는 돌산과 한산을 개간하는 것을 말한다. 남해안 중에 돌산과 한산이 그나마 넓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반대를 했지만 결국 이순신 장군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섬을 개간하게 했다. 이런 이유로 한산에서는 군인들이 둔전 즉 개간을 했고, 여수 돌산에서는 백성들이 개간을 했다. 이로 인해 군량미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됐고, 피란민들 역시 굶어죽지 않게 됐다. 이순신 장군이 고안한 군량미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소금과 과메기였다. 바닷가였기 때문에 소금과 과메기를 만들고, 그것을 팔아서 군량미를 확보했다. 그러다보니 여수 돌산과 한산은 물자가 점차 풍족해졌다. 이런 이유로 칠천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즉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기 전까지 군함 수백척에 군인 1만명 이상의 대함대를 거느릴 수 있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