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해산 명령 내린 통감부
통감부는 1907년 8월 1일 아침 7시 서울 시내 모든 대헨자국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이 자리에서 병부대신 이병무가 순종황제의 조서를 낭독했는데 내용은 대한제국군을 해산한다는 내용이었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 일로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면서 정미7조약을 체결했는데 대한제국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에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에 적대감을 가졌다. 그런데 고종황제 퇴위 반대 군중시위가 7월 내내 이어졌다. 7월 20일에는 대한제국군 소속 병사 100여명이 종로 병영을 뛰쳐나와 고종 퇴위 반대시위대와 합류해서 종로경찰서를 습격했고, 일본 경관들을 살상한다. 이에 일본은 대한제국군 해산을 결행하는데 그 날짜가 8월 1일이었다.무기 반납하라
이에 일본군은 대한제국군 병사들에게 무기를 반납할 계획을 세우고, 대한제국군의 반발을 우려해 훈련원과 각 병영에 자국 군인들을 배치했다. 이처럼 일본군은 해단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당시 대대장이었던 박승환 참령이 “군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내용의 유서와 함께 권총 자살을 한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반납했던 총과 실탄을 꺼내 일본 육군과 교전을 하게 됐다. 8시 30분 1연대 1대대가 봉기를 하자 2연대 1대대 역시 무기고를 파괴하고 일본 육군과 격전을 했다. 그리고 두 대대 이외에도 300여명의 다른 부대들도 항전에 참여하면서 두 대대의 병영이 있던 숭례문에서 서소문(소의문)에 걸친 지역에서 대한 제국군 2개 대대와 이들을 진압하려는 일본군 사이에서 약 오전 9시부터 시작되어 1연대 1대대의 병영이 함락된 11시 50분까지 약 3시간에 걸친 시가전이 벌어진다.일본, 공병대와 기관총 부대 배치
대한제국군의 반발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거센 저항에 결국 공병대와 기관총 부대까지 배치를 하게 됐다. 일본군은 숭례문 문루 위에 2정의 기관총을 설치하고 병영을 내려다보면서 사격을 가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것은 대한제국군의 병사들이 기관총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한국군은 벽과 철문을 이용해 방어를 하면서 집중 사격을 했다. 문제는 일본군은 증원이 계속 되고 있었지만 대한제국군은 탄약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육군 공병대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등 불리한 정세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마침내 함락됐다. 이날 일본군 피해는 전사 4명, 부상자 3~40명, 대한제국군은 68명 전사자, 100여명의 부상자, 516명 포로로 기록돼 있다. 이날 전투에 참가한 대한제국군은 총 1천200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즉, 나머지 대한제국군은 서소문 등을 통해 탈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훗날 정미의병에 가담을 하게 된다. 남대문전투 소식은 빠르게 지방의 진위대로 퍼져나가게 됐고, 전국적으로 봉기를 해서 정미의병에 참여하면서 항일 전선이 구축됐다. 비록 이날 남대문 전투는 패배한 전투였지만 그로 인해 의병은 점차 군대의 기강을 갖추게 됐고, 훗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같은 대승을 이루게 되는 밑거름이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