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가 끝나고
밤9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 움직임이 끝나자 마자 강성구 당시 앵커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8월 4일 목요일 밤 MBC 뉴스데스크입니다. 서울시는 새로운 지하철 건설에 필요한 재원을···”라는 멘트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창영이라는 괴한이 갑자기 강성구 앵커의 마이크에 다가가더니 “귓속에 도청 장치가 들어있읍니다 여러분! 귓속에 도청 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저는 가리봉1동 136의 35번지 사는 소창영이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강성구 앵커는 당황해 하면서 “어... 뉴스 도중에 웬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행패를 부렸습니다마는...”이라고 했고 제압된 소창영은 멀리서 “도청 장”이라고 외쳤다. 결국 스태프는 미리 준비했던 손석희 당시 기자의 뉴스 영상을 내보냈고, 뉴스 영상이 끝나자마자 강성구 앵커가 사과 멘트를 했다.소창영의 기이한 행적
소창영은 1988년 당시 24세이다. 현재 무엇을 하는지 살아 있는지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1988년을 기점으로 기이했다. 구로구 고척동에 있는 ‘대명유압’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던 소창영은 1987년 7월 13일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축구를 하다가, 축구공이 귀에 맞아 고막이 파열됐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귀울림(이명) 증상이 계속됐고, 소창영은 의사가 자신의 귀에 도청장치를 심었다는 방상에 빠졌다. 이에 그해 7월 18일 MBC 주부가요열창 녹화 때 방청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또한 도청장치 방송사고 5일 전인 7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 생방송됐던 MBC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무대에 올라 소리를 질렀다. 1989년 9월 27일에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시위 자리에서 옷을 전부 벗고 “도청장치가 귀에 있다”고 주장했고, 결국 연행됐다. 서울대생들은 시위 분위기가 애매해지면서 자진해산했다. 1989년 12월 2일 MBC 여론광장 명동 현장 생방송에서도 소동을 벌였고, 1991년 3월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알몸으로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쳤다.국가 통제 음모론이 한창이었던 시기
소창영의 이런 소동은 피해 망상에 의한 소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음모론과 덧붙이면서 사회적 파장을 낳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MK 울트라 계획을 시행했는데 CIA 등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불법 세뇌 실험을 자행했다. 그러다보니 미국 내에서도 음모론이 제기됐고, 실제로 미국 의회에서 실체가 밝혀지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국가가 민간인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여기에 고문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소창영의 소동은 단순한 소동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한때 제기됐었다. 한편, MBC는 해당 방송사고 이후 보안담당자들에 대한 문책이 있었고, 보안이 강화됐다. 괴한이 주조종실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방송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귀의 도청장치’는 우리나라 방송 역사상 가장 꼽는 방송사고가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