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소동으로 다급했던 일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빠르게 공업화를 이뤄낸다. 그러면서 농업인구가 빠르게 감소한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세력의 파급을 막기 위해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쌀 공급이 부족해졌다. 그러자 일본 도야마현의 우오즈항에서 훗가이도로 가져갈 쌀을 싣고 있는 배를 300여명의 주부들이 에워싸고 쌀을 팔라고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시발점이 돼서 전국으로 쌀 시위가 번졌고, 결국 데라우치 총리대신이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쌀 공급을 원활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고, 이에 산미증식계획을 조선총독부가 시행을 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땅에서 산출되는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유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조선상인들이 객주회, 신상협회, 근업회 등을 조직해서 쌀 유통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조선상인들이 장악한 유통시장을 격파시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바로 미두취인소였다.몰려든 투기꾼들, 그 속에 반복창
미두취인소가 열리게 되면서 투기꾼들이 몰렸다. 미두취인소에서는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많은 투기꾼들이 몰렸고, 앞서 언급한대로 90%는 조선사람이었다. 이런 이유로 ‘땅문서는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 현금은 인천으로 몰려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속에는 반복창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반복창은 미두 중매점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1920년 자본금 500원으로 한해 40만원(수익률 800배)을 벌어들였다. 당시 40만원이라고 하면 조선땅에 있는 부자 열손가락 안에 들었고, 현금동원에서는 당연히 1위를 차지했다. 그러면서 조선 제1미녀 김후홍이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면서 세간의 부러움을 차지했다. 당시 언론 기사들을 보면 반복창에 대한 부러움으로 넘쳐났다.반복창이 돈 벌 수 있었던 이유
반복창이 돈을 벌 수 있었던 이유는 100석을 거래한다면 1석 당 30원이면 3천원이라는 거대 자금이 필요하지만 미두취인소에서는 증거금이라고 해서 10% 즉 300원만 예치하면 됐다. 즉 적은 액수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또한 만약 1월에 쌀 한 석에 30원이었는데 3월에 40원이 된다면 10원을 남기게 된다. 통상적으로 100석, 1천석 단위로 거래되기 때문에 적은 자본으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시기를 잘 탔다. 1919년 여름 은(銀) 수요가 폭증하면서 일본에서 경제 버블이 일어났다. 일본 내 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당연히 쌀값은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1920년 영국과 프랑스에서 은화의 은 함유량을 변경하는 가치 절하를 하면서 은 가격이 폭락했다. 그러면서 수요가 바닥을 쳤고, 일본의 수출 역시 바닥을 치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내 주식시장이나 선물시장이 폭락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땅에 있는 미두취인소의 미두 거래 역시 폭락할 수밖에 없다.인천 앞바다가 짠 이유
미두 거래 가격이 폭락했다는 것은 조선 투기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미두 거래는 3개월 단위로 이뤄지는데 3개월 후의 미두 거래를 예측해서 쌀값을 결정한다. 그런데 쌀값이 계속해서 폭락한다면 선물거래했던 투기꾼들은 그야말로 쪽박을 찰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정보’에 약했다. 일본사람들은 조선총독부 등에서 나오는 고급 정보를 활용했기 때문에 미두 투기를 한다고 해도 큰 손해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사람은 ‘감(感)’이나 ‘미신’에 모든 것을 맡겼다. 미두취인소 주변에는 점집 등이 횡행했다. 일본투기꾼들은 일본 내에서 이미 선물거래를 해봤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투기를 했다면 조선 투기꾼들은 미신에 의존한 투기를 했다. 일본 내 쌀값이 폭락했으니 조선땅의 쌀값도 폭락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조선 투기꾼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인천앞바다가 바닷물로 채워진 이유는 조선사람들이 흘린 눈물 때문이고, 바닷물이 짠 이유는 조선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토지·자본 모두 몰락
반복창의 신화는 조선팔도에 번지면서 너도나도 제2 반복창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미두취인소로 몰려갔다.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땅문서를, 현금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금을 들고 미두취인소로 몰려갔다. 특히 언론에서 반복창을 부각시켜줬기 때문에 자신도 반복창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미신에 의존한 선물거래였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거지가 돼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보니 땅을 빼앗기고 자본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미두취인소 때문에 조선 백성의 토지가 일본인에게 상당히 많이 넘어갔고, 조선 상인조합도 와해가 됐다. 이런 이유로 상업자본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안전히 끊겼다. 한편, 반복창은 결국 이듬해 몰락했다. 미두 거래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사기죄로 구속됐다. 그리고 조선 제일 미녀인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기에 이른다. 결국 30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정신이상까지 일으켜 비참하게 살다가 4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