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에 기별 어원
조보는 매일 아침 기별청에서 제작해서 배포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이 승정원인데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대통령실’이다. 승정원에서 조보를 발행하면 조보를 만든 곳이 바로 기별청이다. 조보 내용은 신하들이 올린 상소 그에 대한 왕의 답변이 적혀 있으며, 조정 내 인사이동, 과거시험 날짜, 외국 소식은 물론 매일 ‘날씨’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즉,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표현돼 있다.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라고 했다. 아침마다 각 관청에서 조보를 베껴 쓰라고 보낸 서리를 ‘기별서리’라고 불렀고, 지방에 조보를 배달하는 전령을 ‘기별군사’라고 불렀다. 지방관아 수령은 가끔 “아직도 기별이 오지 않았느냐”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때 기별이 바로 기별군사를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날 ‘간에 기별도 안갔다’는 표현에서 기별은 ‘기별군사’를 말한다.왕에서부터 하급관리 그리고 지방 수령까지
조보를 발행한 이유는 단 하나다. 나라가 돌아가는 정보 또는 소식을 왕에서부터 하급관리 그리고 지방수령까지 모두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한양 거주 관료들은 매일 조보를 받아봤다. 하지만 지방은 열흘 혹은 한달 단위로 조보를 받아봤다. 물론 지나간 소식이지만 그 소식을 통해 한양은 물론 각 지역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예컨대 경상도 지역 수령이 함경도 지역의 정보를 입수해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고을을 다스릴 것인지 고민하고 계획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조보를 기다리는 지방고을 수령이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왕실과 조정의 인사 이동 등을 지방고을 수령도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처신을 결정하기도 했다.선조는 민간 배포 금지해
조보가 이처럼 관료 사회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었지만 어느 때부터 민간업자들 사이에서 조보가 인쇄되게 됐다. 선조대인 1577년 민간업자들이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민간 인쇄조보가 목판 인쇄돼서 상업발행했다. 양반들이나 글을 읽을 줄 아는 백성들에게는 민간 인쇄조보는 그야말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면서 날개 돋힌 듯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선조는 국가기밀이 민간에 유출된다고 판단했고, 민간 인쇄조보를 제작한 사람들을 죄다 유배형을 내렸다. 그리고 민간 인쇄조보 발행을 허락한 관료들을 좌천시켰다. 이에 율곡 이이 선생은 윗선은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들이 고생한다고 비판을 가했다.근대식 조보 그리고 신문
선조 이후에도 조보의 민간 발행에 대해 금지를 했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허락 없이 관서지방으로 여행을 갔다는 사실이 적발된 것은 민간에서 유포됐던 조보를 영조가 입수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민간에 유포된 것이라고 해도 기사 자체는 왕실 소속 대간들이 쓴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망연자실했다는 후문도 있다. 조보는 조선 후기가 되면서 점차 유명무실하게 됐고, 고종 때 박문국이라는 관청을 만들어서 ‘한성순보’를 발행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의미의 신문이다. 그리고 민간에서 발행한 최초의 신문은 독립신문이다. 이후 구한말에는 독립신문을 비롯해 매일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의 황성신문등 꽤 많은 언론사가 난립했다. 1957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맞아 신문의 날이 제정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