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통일벼(정부미) 문제
박정희 정권은 식량난 해결을 위해 ‘통일벼’ 보급에 나섰다. 이른바 ‘정부미’로 불리는 통일벼였다. 문제는 ‘질’보다 ‘양’에 치중하면서 시장경쟁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맛은 형편 없어서 ‘보리밥 맛이 통일미보다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롱거리가 됐다. 통일벼는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 전국으로 확대 보급됐지만 수확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지역별로 피해사례가 속출됐다. 그러자 농민들은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고, 정부는 통일벼 피해농가에 대해 1억 5,500만원의 보상금을 전액 금전으로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통일벼는 병충해에 악했다. 더욱이 볏짚이 짧고 약해서 농한기 부수입원이라고 하는 가마니나 새끼를 꼴 수도 없었고, 소가 싫어해서 여물로도 쓸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소비자들이 외면했고, 이에 일반미보다 가격이 쌌다. 통일벼가 일반미의 절반 가격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농민들은 이전과 같은 수익을 얻으려면 일반미의 2배 이상 수호가을 해야 했다. 이에 농민들은 통일벼를 꺼려했다.통일벼 강제하기도
이처럼 소비자와 농민이 모두 통일벼를 외면하자 박정희 정권은 작전상황실을 마련했고, 농민마다 강제 할당량을 제시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산미증식계획을 본따 만든 것이다. 1973년부터 통일벼 목표 달성한 마을에 대해서는 30만원에서 1백만원까지 상금을 수여했고,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은 들판을 누비면서 낱알까지 세서 소출량을 파악해야 했다. 공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농민들은 통일벼를 심기 시작했다. 문제는 병충해 예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바람에 1978년 당시 대흉작이 발생했고, 한 농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소식을 실은 전남매일신문 기자는 국가보안법에 의거 이적행위로 처벌을 받는 등 정치적 박해를 받았지만 중앙일간지들이 속속 해당 기사를 내보내면서 급기야 북한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다뤘다. 이에 당시 장덕진 농림부 장관은 장관직을 떠나야 했고, 피해 규모에 따라 전 농가에 현금 보상과 수매 보상, 농민 부채, 이자 경감 등이 이뤄졌다.전두환 정권부터 점차 쇠퇴
전두환 정권 들어서도 통일벼의 재배가 이뤄졌지만 박정희 정권처럼 강제성이 아니기 때문에 점차 외면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농민들로도 외면을 당했다. 이에 1991년 마지막으로 정부 수매도 중단됐다. 그리고 현재 통일벼는 재배되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했던 통일벼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