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교부 장관이 나서서 “매매춘은 애국적 행위”
박정희 정권은 ‘기생관광’을 애국적 행위로 간주했다. 이효재 ‘한국의 여성운동’이라는 책에는 1973년 6월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이 “매매춘은 외화를 벌어다주는 애국적 행위”라고 표현했다. 당시 국회의원들도 기생관광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쏟아냈는데 훗날인 2003년 2월 9일자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익명으로 처리된 발언들이 소개됐다. K의원은 “돈을 들이지 않고 밑천을 들이지 않고 외화를 획득하는 길은 이 길 밖에 없다”고 말했고, C의원은 “일본이 미군 상대로 창녀를 애국자로 미화했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윤락여성을 미화해 여성전사로 부각시키자”고 발언했다. A의원은 “가장 미인인 한국여성의 값이 세계에서 제일 싸다고 합니다. 여성의 몸값을 올려주는 것이 결국 지위향상이 아니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 여성동아 1973년 7월 호에는 리영희 선생의 글이 실렸다. 리 선생은 “이 나라가 해마다 수십, 수백만 명의 외국인을 끌어들이려는 목표로 관광 한국을 자랑하는 동안, 말하기는 다소 쑥스러운 일이지만 일본인에 의한 밤의 수요가 느는 바람에 농촌 소녀는 서울 외곽으로 몰려들고, 외곽의 여성은 중심가로, 중앙 지대의 여성은 호텔로 모인다는 호텔 사람들의 설명이다”고 기고했다.기생관광 장려했던 박정희 정권
박정희 정권이 기생관광을 장려했던 이유는 1971년 9만명 수준이었던 일본 관광객은 1972년 21만 명, 1973년에는 47만 명 수준으로 가파르게 상승했고, 70년대가 끝나가는 1979년이 되면 65만 명 수준이 된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전체 관광객의 70%인데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 85%가 아내나 애인 없이 홀로 온 남자 고나광객들이었고, 일본 여행사에서는 ‘한국 기생 파티 관광단 모집’이라는 간판을 내걸어 관광객을 모집했다.접객원 증명서 발급
이처럼 당시 기생관광이 기승을 부리면서 박정희 정권은 아예 기생관광을 국가사업으로 취급했다. 한국관광공사 전신인 국제관광협회의는 ‘요정과’를 설치했고, 관광기생에게 접객원 증명서를 발급했다. 접객원 증명서란 당시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통행금지 시간에 마음대로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통행증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기생관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반에 깔리게 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일본인 남성들 역시 우리나라로 기생관광을 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건전한 여행이 정착되면서 기생관광이 사라지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