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문했던 보빙사, 엘리베이터에 놀라
원래는 남녀 따지지 않아
미국에서 엘리베이터가 발명됐다고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작동법을 잘 몰랐다. 이런 이유로 작동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작동을 시켜줘야 했다. 승강기 운전원이라는 직업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승강기가 워낙 잦은 고장이 발생하기 때문에 승강기 운전원 이외에는 작동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승강기 설치 기관에서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은 항상 승강기 운전원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면서 그에 따라 승강기 운전원이 필요했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을 승강기 운전원으로 고용했고, 엘리베이터 걸이라고 불렀다. 정확하게는 ‘에레베타 껄’이었다. 이는 ‘데파트 껄(백화점 여종업원)’ ‘까솔린 껄(주유소 여종업원)’ 등과 함께 서비스 직종은 젊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렸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 여성이 남성 고객의 시중을 들게 하는 일제강점기의 성차별적 풍조가 담긴 것이다.아파트에도 등장한 엘리베이터 걸
해방 이후에는 초고층 건물이 없기 때문에 이른바 엘리베이터 걸인 승강기 운전원의 고용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대 들면서 점차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파트 역시 초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세운상가 아파트가 국내 최초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아파트이다. 다만 5층부터 엘리베이터가 운용됐다. 그리고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층부터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아파트에는 승강기 운전원 즉 엘리베이터 걸이 존재했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접한 아파트 주민들에게 원활한 작동을 도와주기 위해 승강기 운전원이 존재한 것이다. 1970년대 아파트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승강기 운전원’의 일자리도 늘어났다. 그러면서 젊은 여성들은 승강기 운전원으로 취업하는 것을 로망의 대상이 됐다. 그러면서 당시 신문에는 엘리베이터 걸을 채용한다는 광고가 실렸는데 ‘단정한 용모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규정했다. 기업들은 자신의 기업 이미지를 홍보하는 용도로 엘리베이터 걸을 사옥 마스코트로 내세웠다. 이에 매년 미인 엘리베이터 걸을 특채해서 고객 서비스의 첨병 역할로 맡긴다는 식의 홍보도 했다.국회의사당에는
국회의사당에는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리고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 걸이 있었다. 다만 엘리베이터 걸의 역할이 단순히 승강기 운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의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책을 읽어줬다. 승강기 운전원이 성희롱을 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1990년대초 TV 드라마와 소설에서는 회장님과 엘리베이터 걸의 관계를 다루기도 햇다. 1993년 작고한 이건희 삼성 회장은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엘리베이터 걸과 어쩌니 등등”의 루머가 났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니면 그뿐이다’고 생각하고 해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답하기도 했다.승강기 운전원 없애기로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승강기 운전원이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면서 없어져야 할 직업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엘리베이터의 보급으로 이제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작동에 익숙해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자 정부는 1991년 관청 승강기 안내원들을 1995년까지 모두 없애기로 발표했다. 국회 역시 1994년 9월 “의원 승강기의 여자 안내원은 낭비고 고루한 권위주의의 산물”이라며 없앴다. 다만 특급호텔에서는 서비스 차원에서 계속 유지됐지만 그것 역시 비난을 받으면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국회 고등검찰청 국정감사 당시 엘리베이터 걸이 급조돼 과잉 의전 논란이 불거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