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가계부 1/3은 접빈
조선시대 양반의 가계부를 살펴보면 전체 수입의 1/3을 접빈에 썼다고 한다. 즉, 손님을 대접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접빈은 ‘친하건’ ‘친하지 않건’ ‘양반이건’ ‘노비이건’ 가리지 않았다. 나그네들이 해당 고을에서 좀 살만한 집 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 외치면 웬만한 집주인은 손님을 쫓아내지 않고 나그네를 재워주고 식사도 주고, 노잣돈도 쥐어줬다. 심지어 ‘부북일기’라는 기록물에는 주인공 박취문과 일행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좌수 이득곤 댁 계집종 통진, 의성현 검동댁 계집종 분이, 김팽남 댁의 딸 예현, 향교의 계집종 옥환 등과 잠자리를 했고, 이 외에 관청 소속의 여자 노비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양반들의 접빈 문화를 중요시하게 생각했다. 이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란 말에서 그대로 담겨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갓집은 접대용 음식과 술빚기를 항상 해왔고, 손님이 오면 귀천 따지지 않고 접대를 했다. 그것이 양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접빈 하는 이유는
접빈 문화는 김삿갓의 시조 ‘황혼축객비인사’라는 것에서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밤늦게 재워달라는 나그네를 쫓아내는 것은 패륜이라는 이야기다. 야사에는 인조 시절 유혁연이 수원부사로 재임 중에 백부가 되는 유충걸이 수원을 지나다가 민가에게 유숙을 청했지만 거절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유출걸은 수원부사인 유혁연을 불러서 꾸중을 했고, 이에 유혁연은 수원 백성들을 잡아 곤장을 쳤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양반들이 접빈을 하는 것은 양반이라서가 아니라 ‘정보 교환’ 때문이기도 하다. 재산을 불리거나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팔도 곳곳의 정보가 필요하다. 문제는 당시 인구의 이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양반가로서는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 이런 이유로 지나가는 나그네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 가장 대표적인 집안이 경주 최부자 문중이다. 접빈에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경주 최부자의 관대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도 있지만 정보를 취득하기 위한 것도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가 되면서 인구의 이동이 너무 활발하게 잦으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지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면서 점차 접빈 문화가 줄어들고, 대신 마을에 주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