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28일 경성부, 경기도에서 분리돼서 서울로
[역사속 오늘리뷰] 9월 28일 경성부, 경기도에서 분리돼서 서울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28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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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청.
경성부청.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6년 9월 28일은 경기도에 편재돼 있던 경성부가 미군정에 의해 분리돼서 서울로 바뀐 날이다. 경성부는 1910년부터 이날까지 경기도 행정구역으로 존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시민지배하면서 더 이상 한성부가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한성부를 폐지한 것이다. 그렇게 경성부는 오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미군정에 의해 서울시로 독립하게 됐다.

대한제국 수도 지위 상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뤄지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그러면서 일제는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폐지하게 됐다. 1910년 10월 1일부로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가 발표됐고,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로 편입됐다. 즉, 경기도청 직할 구역이 된 것이다. 사실 경성이라는 표현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도 사용된 단어인데 임금이 거하는 도시라는 뜻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당시 한양의 수도 지위를 박탈하면서 그 지위를 격하시켰다. 즉,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경성’과 일제시대의 ‘경성’은 그 지위가 완전히 다르다.
경성부 중구 본정(현 충무로)
경성부 중구 본정(현 충무로)

일본인들의 경성 거주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게 되면서 이제 본격적인 일본인의 거주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883년 이후 일본인 상인이 한성부에 거주를 했는데 경성부로 바뀌면서 본격화됐다. 이에 주로 남촌과 용산 등지에서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그 이유는 한성 중심지인 북촌은 청일전쟁 직전까지 청나라 사람들이 선점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주로 남촌과 용산에 거주를 하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패권을 잡으면서 남대문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게 됐고, 그러면서 용산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됐다.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 사람들이 빠져나간 북촌은 조선인 거주지가 됐고, 남촌과 용산은 일본인 거주지가 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주로 남촌과 용산을 개발했다. 이에 북촌과 종로를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고, 일본인들은 남촌과 용산을 중심으로 명동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명동이 상업지역으로 발전을 하게 됐다.

중일전쟁 전초기지

경성부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초기지로 삼았다.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군은 부산역에서 경성으로 와서 용산기지에 주둔했다가 중국으로 넘어갔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중일전쟁이 아닌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전쟁이 되면서 오히려 이번에는 조선 백성들을 강제징용하게 되면서 조선백성들이 경성부에 모였다가 인천이나 부산 등을 통해 태평양 각 지역으로 강제징용됐다. 그리고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향락을 즐겼다. 향락을 즐긴 이유는 일본 본토는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각종 유흥문화를 중지시켰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의 유흥은 허용했다. 일본군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유흥을 한번 즐기고 나가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일본 고위 관직들은 경성부에 와서 유흥을 즐기는 것을 원했다. 아울러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군은 일본 본토를 공습했지만 조선땅은 공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흥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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