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2일 런던대화재 발생
[역사속 오늘리뷰] 9월 2일 런던대화재 발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02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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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666년 9월 2일 런던대화재가 발생한 날이다. 이날 화재는 소방당국의 어처구니 없는 무책임으로 인해 대화재로 번졌고, 오늘날 화재보험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사실 런던대화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조속히 진화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소방당국은 불을 무시했고, 그것이 대화재로 번지게 된 것이다. 그만큼 당시 유럽 사회에서 소방 정책이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대화재를 계기로 영국은 각성을 하면서 현대적 의미의 소방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8만 중 7만명의 집이 파괴

런던대화재로 인한 피해는 1만 3천200채의 가옥과 87채의 교구 교회, 세인트폴대성당, 그리고 대부분의 건물들을 파괴해 버렸다. 이는 도시의 8만 명의 주민들 중에서 약 7만 명의 집을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은 푸딩 레인의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불이 났다. 당시 런던의 소방 시스템은 국가 소방 체계가 아니라 민간인들이 얼마씩 갹출한 자금으로 운영되는 민영 소방 체계였다. 그리고 해당 제과점은 출자자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소방관이 출동하지 않았다. 당시 화재를 진압하는 방법은 건물을 철거하고 방화벽을 설치해 소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당시 런던 시장격인 토마스 블러드워스는 제과점이 출자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소방관을 출동시키지 않은 것이다. 결국 불은 급속도로 런던 곳곳으로 옮겨 붙었다. 조그마한 불이 워낙 큰 불로 바뀌게 되면서 런던 시민들은 당시 2차 영국-네널란드 전쟁 중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프랑스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상황

그렇게 런던 시내가 모두 불타면서 오히려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됐다. 런던대화재로 인해 ‘쥐’가 모두 불에 타면서 흑사병이 종료됐다. 당시 흑사병은 쥐가 옮기는 전염병인데 쥐가 모두 불타면서 흑사병의 전염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흑사병이 종료됐다. 다른 나라에서는 흑사병으로 고생을 하는 동안 런던은 흑사병이 종료되면서 그로 인해 국력을 축적할 수 있게 됐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런던을 체계적인 도시로 탈바꿈 시킬 수 있었다. 런던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도시이기 때문에 계획도시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런던대화재로 인해 모든 것이 불타면서 계획도시로 만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또한 런던시민들은 왕정을 폐기하고 공화정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찰스 2세는 항상 자리가 불안했다.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초창기에 찰스2세가 왕립군을 투입해서 진화를 하겠다고 하자 치안판사들은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워낙 불길이 거세지면서 런던 시장이었던 토마스 블러드워스에게 그 지휘권을 물려받게 됐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근대식 소방 체계 출현

앞서 언급한대로 기존에는 출자자들끼리만 보호하는 식의 소방 체계였다면 런던대화재 이후 근대식 소방 체계가 출현하면서 출자자들 이외에도 보호하는 식의 소방 체계로 바뀌었다. 그것은 시정의 역할이 단순히 출자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를 위한 정책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또한 런던대화재 이후 화재보험이 출현했다. 이는 니콜라스 바번이 런던대화재 이전에는 의사였지만 대화재 이후 건축업으로 전향해서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돈을 조금 받고 화재 전에 사람들이 살던 집과 같은 집을 지어주는 회사를 차리게 됐고, 이것이 화재보험의 기틀이 된 것이다.

억울한 죽음

런던대화재가 일어나면서 런던의 민심은 흉흉했다. 이는 공화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왕정을 언급하는 찰스 2세 모두 위협적인 것이었다.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외국인이 런던대화재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로마대화재 당시 기독교인들이 대화재를 일으켰다고 주장한 네로 황제를 따라한 것이다. 이에 범인으로 붙잡힌 사람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시계 제작자 로버트 휴버트이다. 온갖 고문에 결국 휴버트는 자신이 웨스티민스터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하지만 웨스터민스터는 불이 나지 않았다. 이에 휴버트는 제과점 창문에 수류탄을 던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과점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을 선고 받았고, 교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몇 년 후 휴버트가 런던대화재 이틀 후에 런던에 온 사실이 알려졌고, 결국 억울한 죽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런던대화재 300년이 지난 1986년에야 실제로 화재 원인을 제공했던 제과점 주인의 후손이 사과하며 사건이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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