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소금세 그리고 간디 불복종 운동
[역사속 경제리뷰] 소금세 그리고 간디 불복종 운동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15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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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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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1930년 3월 12일부터 4월 30일까지 소금 행진을 벌였다. 마하트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소금행진으로 인해 불복종 저항운동이 펼쳐지면서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이라는 희망을 품게 됐다. 소금행진은 영국으로서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간디와의 협상이 불가피하게 됐고, 이에 인도는 점차 독립의 길을 걷게 됐다.

소금세 부여했던 영국

영국은 1882년부터 식민지 인도에게 엄격한 간염법과 과세 정책을 시행했다. 인도에서 채취한 소금을 영국으로 운송해 가공을 마치고 인도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해 되팔았다. 소금령에 의해 인도인은 소금을 직접 만들어 쓸 수 없었고, 천일염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이에 인도인들은 억지로 비싼 소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의 재정은 튼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간디는 이 점을 간파했고, 소금행진을 제안했지만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콧웃음을 쳤다. 실제로 당시 인도의 유력 잡지인 스테이츠맨은 “소금이라니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지각이 있는 인도인이라면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라고 만평했다. 하지만 간디는 소금행진이 영국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히는 그런 불복종 운동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사트야그하라 일환으로

1930년 2월 5일 인도 신문들은 간디가 소금법에 불복종하는 시민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소금행진은 간디가 주창한 ‘사트야그하라’의 일환이었다. 3월 2일 인도 총독 어윈 남작에게 간디는 편지를 보냈는데 11개 개혁안을 담았다. 그것은 군비 축소, 수입 섬유의 관세 처리, 소금세 폐지였다. 하지만 어윈 남작은 편지를 무시하고, 간디와의 회담도 거부했다. 이에 3월 12일 간디가 소금행진을 시작했다. 처음 참가 인원은 78명이었다. 이는 간디가 이끄는 아슈람 일원이었다. 소금행진은 구자라트주 사바르마티에서 출발해 단디까지 385km였다. 일정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자발적인 참가자가 늘어났고, 행진 길이가 3km에 이르렀다. 4월 6일 단디에 이른 간디는 기도를 마친 후 소금기가 밴 진흙을 손데 쥔 후 사람들에게 “나는 소금을 만들어 대영제국의 근간을 흔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바닷물을 끓여 불법으로 소금을 채취했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소금을 만들었고, 이것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간디는 자신이 만든 소금을 1600루피에 팔면서 영국 경찰에게 체포를 당했다. 하지만 이미 소금행진 대열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인도인이 스스로 소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금 뿐만 아니라 다른 제품들도 스스로 만들면서 영국산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번졌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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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소비 시장 빼앗길 판

영국으로서는 최대 소비 시장을 빼앗길 판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도라는 거대한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더 많은 법을 제정하고 검열을 하는 동시에 인도 국민회의를 불법 단체로 규정짓는 등 사태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인도인들의 불복종 운동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됐다. 어윈 남작은 결국 간디와의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윈 남작은 불복종 운동의 중단 대가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윈 남작 후임 총독인 윌링던 경은 더욱 강경 노선으로 갈아탔고, 간디는 불복종 운동으로 감옥에 다시 수감되었고, 영국은 그를 고립시켜서 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 했다. 그러나 간디의 불복종 운동은 이미 전세계에 전파되면서 인도의 독립을 더욱 고취시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인도는 독립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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