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19일 세종대왕 즉위하다
[역사속 오늘리뷰] 9월 19일 세종대왕 즉위하다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1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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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418년 9월 19일(음력) 세종대왕이 즉위식을 가진 날이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성군으로 칭송받는 임금이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로 원래 왕위 계승의 순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대군이 워낙 개차반을 해서 결국 셋째인 창녕대군에게 그 순서가 돌아간 것이다. 혹자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물려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이 된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장자 계승 원칙

충녕대군은 1397년 음력 4월 10일 정안군이었던 태종 이방원과 정녕옹주였던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 순서로 보면 왕위 계승에서 한참 먼 인물이다. 위로 다섯 명의 형이 있었지만 3명은 어린시절 요절했기 때문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이어 3남으로 자랐다. 12살에 충녕군으로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 대군으로 진봉됐다. 대군이었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인 독서를 전적으로 지원해줬다. 이런 이유로 충녕대군은 학문을 비롯해서 미술, 음악, 수학 등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으며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1차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따라서 충녕대군은 그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아들에 불과했다. 왕도 될 수 없고, 벼슬길도 나아가지 못하는 왕자의 신분인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정도였다.

언제부터 왕위를 노렸나

다만 충녕대군이 왕위를 노렸다는 기록은 많이 남아있다. 양녕대군(세자)의 기행과 방탕함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어가면서 충녕대군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때 태종은 세자(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을 비교했고, 이것이 세자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문제는 충녕대군이 세자의 기행과 방탕함을 꾸짖는 장면도 있다. 매형인 이백강이 기생을 거느리고 세자에게로 데리고 가려고 하자 꾸짖었다. 또한 세자가 새 옷을 장만했다고 자랑하자 충녕대군은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언을 했는데 옆에 신하들이 있었다. 즉, 신하들 앞에서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을 꾸짖은 것이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충녕은 심약한 놈”이라고 헐뜯자 태종은 “유약해도 결단력에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고 두둔을 했다.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결정적인 장면은 충녕대군이 1차 왕자의 난 당시 살해된 남은의 형인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도중 남재가 충녕대군에게 태종이 정안대군 시절 학문을 권했는데 정안대군이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하나”라고 해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충녕대군은 이 말을 태종에게 알렸는데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라면서 웃기만 했다. 충녕대군이 왕위 계승의 욕심이 있다는 것을 태종에게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고, 그것을 태종은 웃으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즉, 충녕대군이 왕위 계승에 상당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양녕대군의 비행이 없었다면

충녕대군이 왕위 계승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양녕대군의 비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일부러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비행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이 된 이후에도 양녕대군의 비행은 계속 이어졌고, 그때마다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하지만 충녕대군은 양녕대군을 비호했다. 태종은 충녕대군이 왕위 계승에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때부터 계승 작업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했던 것이 1418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양위를 선언했다. 태종은 재위 기간 중 수시로 선위를 한다는 발표를 하면서 신하들이 이번에는 믿지를 않았다. 이에 9월 19일 태종은 세자인 충녕대군에게 즉위식 때 입는 면복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번에는 진짜라는 것을 알아채고 조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태종은 군권만큼 틀어쥐었다. 그리고 세종의 장인 집안인 심씨 집안을 멸문시켰다. 심온에게 강상인 사건을 빌미로 죽이고, 세종대왕의 부인인 소현왕후의 어머니 역시 노비로 강등시켰다. 이와 함께 황희를 발탁하게 했다. 황희는 폐세자 건으로 유배를 갔는데 세종대왕이 즉위한 후 태종은 세종대왕에게 황희를 발탁할 것을 주문했다. 즉위할 당시 세종대왕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이원, 우의정 정탁,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허조판서 이지강 등이었는데 모두 태종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은 즉위 초부터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태종이 황희를 발탁할 것을 주문했고, 황희를 발탁했다. 그때부터 세종대왕은 점차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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