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연산군 그리고 흥청망청
[역사속 경제리뷰] 연산군 그리고 흥청망청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19 13: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영화 간신의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시대 가장 포악한 군주라고 하면 ‘연산군’을 떠올린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고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연산군에 대해 역사가들이 묘사할 때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흥청’이다. 흥청을 설치하면서 그에 따라 왕의 사치가 극에 달했고, 결국 연산군이 폐위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가 중 일부는 연산군 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잘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영화 간신의 한 장면.

흥청망청이란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사 혹은 채청사를 둬서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하게 했다. 그중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는 기관에 있게 했다. 연산군은 이들을 간택할 때 분칠하지 않는 자를 뽑으라고 했다. 그리고 흥청을 통해 유흥을 즐기다가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가 되면서 이것이 흥청망청의 어원이 됐다. 그런데 과연 흥청이 연산군 폐위의 원인이 됐냐는 것에 대해서 역사가들 중 일부는 의문부호를 찍는다. 왜냐하면 경국대전에는 여성 기생 150명, 춤추는 기생 연화대 10명 등을 매 3년마다 각 고을의 관비 중에서 어리고 총민한 자들로 뽑아 올리라는 규정이 있다. 가장 근검절약한 왕으로 꼽히는 영조 때 고쳐진 속대전에는 ‘왕실 연회 때에는 각 지방 고을에서 여성기생 52명을 뽑으라는 조항이 있다. 즉, 연산군만 기생을 뽑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왕들이 모두 그러했다. 즉, 연산군 때 흥청이라는 기관을 만들었을 뿐이지 어떤 시대이든 여성 기생들을 뽑아 궁궐에 두게 했다. 특히 세조대왕의 경우 중건한 절(사찰)을 아예 기생방으로 만들었는데 현재 탑골공원이 있는 원각사가 그곳이었다. 다만 기생을 운영하는 것이 다른 왕들이 비해 막장이었다. 궁궐 내관이었던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선대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풍기문란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고 간언했고, 이에 연산군은 격분해서 김처선을 죽였다. 그러나 흥청을 뒀다고 해서 중종반정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일기 어느 곳에서도 흥청에 대한 신하들의 비판은 없었다.

조세 제도의 변화

그런데 연산군 때에 조세 제도의 상당한 변화가 생기게 됐다. 조선이 건국할 당시 조세 제도는 당나라 조용조를 따라했다. 일반 백성들에게 전세, 군역, 공납을 구별해서 거두게 됐다. 초창기에는 조세의 대부분을 전세 즉 토지세로 거뒀는데 이는 호적을 철저히 파악해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세금의 부담이 약했지만 지주(军阀)들의 부담은 상당했다. 특히 세종대왕 당시에는 지력과 풍흉에 따른 토지 생산물의 평가 방식인 전분(田分) 6등법과 연분(年分) 9등법을 시행하면서 조선시대를 가장 공정한 이상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단종 때 계유반정이 일어났다. 계유반정으로 인해 훈구파가 득세를 하면서 지주층이 조정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세조(수양대군) 역시 공신들에 의해 집권을 하게 되면서 공신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사용하다보니 전세 즉 토지세의 비중이 약화되고 공납의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세조 이후에도 비슷하다보니 어느 덧 공납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산군은 내수사 직계제를 실시했다. 내수사 직계제는 공납의 비중을 확대해서 왕실의 재정을 확충하자는 것이었다.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연산군의 금표 지정

연산군은 왕실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또 다른 방법으로 금표(禁標)를 지정해 농토를 마구 빼앗았다. 문제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아닌 대신과 대간의 사유지를 사유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연산군이 사치를 했다고 하지만 성종이나 중종에 l하면 심각한 지출이나 백성들에 대한 징세가 없었다는 역사가들도 있다. 다만 왕실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금표를 두른 것에 대한 대상이 백성이 아니라 훈구파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토지 즉 지주들 입장에서는 연산군은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막장으로 치닫는 그런 연산군의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중종반정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훈구파에 의해 옹립된 중종이기 때문에 조세 제도는 개혁을 하지 못했고, 결국 도적떼가 출몰했다. 임꺽정 역시 중종 때의 도적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한양에 도적떼가 출몰해서 이에 대한 회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흥청망청 과소비를 해서 몰락했다면 중종 때는 그에 대한 개선이 있어야 했지만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떼가 출몰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