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명동
[오늘 통한 과거리뷰] 명동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0.07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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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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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코로나19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파문으로 인해 위축됐던 명동 상권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왔던 명동 상권은 유럽, 미국 등 서구권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이유는 사회적 거리두기 종료, 입국 전 유전자증폭(PCR) 검사 해제 등 방역조치가 빠르게 풀리고 있는 데다, 킹달러로 원화 가치가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명동은 과거에는

명동은 명례방으로 불리었고, 조선시대에는 남촌이라고 불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한 후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고관대작들은 주로 북촌에서 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궁궐과 가까운 것은 물론 6조 관청과 종로 육의전과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촌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는 하급 관리나 평범한 선비들은 보다 저렴한 주택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이유로 남촌에서 거주했다.

임오군란 이후

이런 남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강화도조약 이후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일본인 40명이 조선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한성의 진고개 일대에 거주를 하기 시작했고, 이 일대를 본정(本町) 즉 혼마치로 불리게 됐다. 일본인의 으뜸 거주지라는 뜻이다. 그것이 오늘날 충무로가 됐다. 그런데 1896년 혼마치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1839명으로 늘어났고,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1만명이 됐고, 경술국치인 1910년에는 3만명이 훌쩍 넘어섰다. 그러다보니 혼마치(충무로)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지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94년 일본인 상점이 남대문로에 문을 열었다. 하지만 남대문에는 이미 조선인 상인들이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거주지의 서진 정책은 막혀버리게 됐다. 이에 반대편인 동진을 하기 시작했고, 신정(新町)이라면서 요릿집, 유곽 등 유흥업소를 세웠다. 그러면서 점차 남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메이지 덴노를 따서 메이지초(明治町, 명치정)라고 불렀다. 일본인 거주지가 늘어나면서 그에 따라 상권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백화점 등이 메이지초(명동)에 들어서게 됐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명동이라고 불렀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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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중심지에서 상권의 중심지로

명동은 1922년 경선현물취인소가 자리매김하면서 금융의 중심지가 됐다. 하지만 1979년 여의도 증권거래소가 들어서면서 명동은 상권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동네가 됐다. 이어 관광 쇼핑의 중심지가 됐다. 그것은 유동인구가 많을뿐더러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들의 필수코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사드 문제가 불거지면서 중국인 관광객 발길이 뚝 끊기면서 상권이 죽었지만 킹달러 영향 등으로 인해 서구 유럽의 관광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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