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개월치 급료 미지급
조선 조정은 기존 오군영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으로 통폐합하고, 일본의 후원 하에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면서 구식군대와 신식군대가 차별대우를 받게 됐다. 그런데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구식군대로서는 일본의 후원을 등에 업은 별기군과 그들을 우대하는 조선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기 충분했다. 당시 구식군대는 군정이 문란해지면서 급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농사 혹은 막일을 통해 각자 생업에 종사하면서 한달에 며칠 정도만 근무하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급료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생계가 당장 ‘더욱’ 어려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왜 13개월 급료 미지급 됐나
13개월이나 급료가 미지급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부정부패’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보다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삼정의 문란’이 발생하면서 조세 체계가 무너졌다. 그런 가운데 조선 조정은 그야말로 부정부패로 얼룩졌다. 탐관오리들이 나오면서 그에 따른 부패가 막대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13개월 급료가 미지급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최근 들어서는 1876년 체결한 조일수호조규 때문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즉 강화도 조약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조선과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를 맺었는데 부칙 제6칙에는 “이후 조선국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 인민은 양미(糧米)와 잡곡을 수출, 수입할 수 있다”고 돼있다. 경제적 조약을 맺을 때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게 되면서 상당량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게 된 것이다. 조선은 ‘쌀’이 화폐이고, 공무원의 급료를 ‘쌀’로 지급했다. 그런 쌀이 일본으로 대량으로 유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실제로 1876년부터 쌀의 반출을 금하는 방곡령이 1890년대까지 100여건이 내려졌다. 즉, 시도때도 없이 방곡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만큼 쌀 유출이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3개월치 중에 1개월치만 줬다는 것은 선혜청에 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나마 전라도 조미가 도착했기 때문에 쌀을 지급했다는 것은 그만큼 전국적으로 쌀이 부족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조일수호조규 때문에 쌀이 일본으로 유출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차라리 솔직했다면
1882년 선혜청에 전라도 조미(漕米)가 도착했다. 이에 구식군인들에게 밀렸던 급료 13개월치 중 1개월치를 지급하게 됐다. 문제는 선혜청 관리들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조미에 썩은 쌀겨, 모래를 섞었다. 구식군인들이 선혜청으로 몰려가서 쌀을 새로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선혜청 관리들이 군인들을 모욕하자 군인들이 분노가 폭발해서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하고 주변 기물을 파손했다. 해당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 동안 급료가 밀렸는데도 그동안 항의 한번 하지 않고 군령을 어기지 않은 것에 대해 “가상한 일이다”면서 오히려 구식군대가 난동을 부린 것에 대해 이해를 했다. 문제는 후속 대책이었다. 선혜청 제조 민겸호가 주동자를 구속해버린 것이다. 차라리 “나라 사정이 어려워 봉급을 제대로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했더라면 구식군대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대로 구식군대는 ‘투잡’을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치적 이해관계도
흥선대원군이 집권을 하자마자 내세운 것이 ‘쇄국정책’이다. 쇄국정책의 핵심은 ‘국방력’ 강화에 있다. 그것은 5군영의 강화와 이어진다. 따라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5군영 즉 구식군대의 대접이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고종이 직접 정사에 나서면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곧 ‘5군영’의 지위를 약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고종 입장에서는 구식군대는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 잠재적 요소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별기군에 상당한 공을 들이면서 구식군대를 차별한 것이다. 그것이 선혜청의 푸대접으로도 이어지게 된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