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태권도
[오늘 통한 과거리뷰] 태권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0.19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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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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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태권도 격파 시범을 구경하던 20대 여성이 부서진 송판 파편에 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시에 사는 직장인 A씨는 지난 15일 주말을 맞아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을 새로 단장한 후 기획한 태권도 상설 공연을 구경했는데 송판 파편을 맞은 것이다. 이에 A씨는 피부가 찢어져 얼굴에서 피를 흘렸고, 119구급차를 타고 즉시 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다친 부위를 꿰매고 엑스레이와 컴퓨터단층촬영(CT)을 통해 코뼈가 부러진 사실을 확인했다.

태권도는 대한민국 현대무술

1950년대 국내 무술계는 당수도, 공수도, 권법, 화수도, 수박도, 태권도 등의 명칭이 난립했다. 그 중 최홍희라는 사람이 1954년 무렵 전후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 불렀다. 워낙 많이 난립을 하면서 1950년대 후반 무도인들은 통합체의 설립 필요성을 공감하게 됐는데 문제는 명칭의 통일이었다. 그러던 과정 속에서 1959년 오도관 초대관장 최홍희가 군 장성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밀어붙이면서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로 명칭이 바뀌기는 했지만 1965년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됐다. 태권도의 ‘태’는 발을 의미한다. 즉, 주먹과 발로 하는 무술이라는 뜻이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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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때 예편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로 명칭이 바뀌게 된 이유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박정희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최홍희가 군에서 예편당하면서 말레이시아 대사로 밀려나 외국으로 떠돌게 됐다. 이에 대한태권도협회가 와해됐고, 1961년 9월 무도인들은 대한태수도협회를 만들었다. 태수도는 태권도와 공수도, 당수도를 절충한 것이다. 1964년 10월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온 최홍희는 1965년 1월 회장직으로 복귀를 성공한다. 이에 대한수박도회와 통합을 하면서 1965년 8월 대한태권도협회로 이름을 바꾼다. 1966년 3월 국제태권도연맹이 창립되면서 최홍회는 총재가 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 태권도는 독창적인 품새 등으로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70년대 들어와서는 태권도의 이론화와 체계화가 이뤄졌다. 그런 과정 속에서 1971년 1월에는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행정인사 김운용을 태권도계로 끌여들여 그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운용은 국제감각과 본인의 외교력을 발휘해 태권도를 성장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다.

태권도의 세계화

1972년 최홍희는 자신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면서 캐나다로 망명을 간다. 그러면서 국제태권도연맹의 거점도 캐나다 토론토로 옮겨지게 됐고, 이후 북미에서 태권도가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됐다. 1980년대 들어 북한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이후엔 북한을 비롯한 중국, 소련, 동유럽 등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중점적으로 보급했다. 국내에서는 세계태권도연맹을 출범시키고 김운용을 초대 회장으로 앉힌다. 이러면서 국제태권도연맹과 세계태권도연맹이 갈등을 보이게 된다. 그러면서 세계태권도연맹은 태권도의 스포츠화에 앞장섰으며 GAISF(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에서 스포츠로 정식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어 1980년 8월 WT의 태권도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선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는 영예를 이루게 된다. 이후 1994년 9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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