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으로 뭉친 사회주의 공동체
초기 교회는 신자들의 자발적 재산 헌납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교회에 재산을 바치고 재산을 평등하게 나눠가졌다. 교회 안에서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날 경제사회학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사회주의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라는 신적인 존재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으로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꾸려 나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소규모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으로 뭉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말론을 믿었고, 종말이 가까워왔기 때문에 재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이런 이유로 재산 헌납이 가능했고, 그리고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사회주의적 공동체는 로마시대에는 암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아닌 여호와를 신봉하면서 국가가 아닌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려 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로마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의 탄압이 로마에 상당히 많이 벌어졌다.봉건주의 시대에 교회는
그런데 고대로마가 무너지면서 봉건시대가 도래하자 교회의 역할이 상당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가 행정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에는 왕이나 귀족 등 중에는 문맹인 사람이 많았다. 또한 서로 영토 다툼이 있었기 때문에 왕조가 무너지는 것은 빈번했고, 귀족 가문이 몰락하는 것은 빈번했다. 하지만 해당 영토에 사는 백성들 특히 농노들은 계속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들을 돌봐줄 행정업무가 필요한데 그것을 교회가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봉건시대 왕이나 귀족들은 교회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았고, 교회는 재산을 바탕으로 지식인들(신부, 수녀) 등을 배출할 수 있었다. 신부와 수녀들은 성경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글을 배웠고, 그들이 지식인으로 마을의 행정업무까지 다룰 수 있었다. 태어나면 유아세례, 성장하면 첫 영성체를, 견진성사, 결혼식도 교회에서, 죽어서도 교회에서 하는 것은 바로 ‘호적 관리’였다. 즉, 누가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죽었는지를 교회가 행정업무를 하는 것이다. 왕과 귀족들이 소멸할 때에도 교회는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행정업무가 가능했다. 또한 종교재판도 가능했던 것은 역시 지식인이 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나 귀족들도 앞서 언급한대로 문맹이 많았기 때문에 재판을 교회에 맡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종교개혁 이후
그런데 중세를 넘어서면서 종교개혁이 이뤄졌다.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가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카톨릭의 교회는 교황의 지시를 받는다면 개신교의 교회는 목사 개개인으로 움직였다. 절대왕조 시대가 도래하면서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행정업무는 절대왕조에게 빼앗기게 됐지만 구호활동은 여전히 교회가 담당했다.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 잘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등 구호 활동에 힘을 썼다. 아울러 마을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면서 숙박시설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중세 이전에는 이동의 자유가 제약을 받았지만 근대 들어서면서 점차 이동의 자유가 활발해지면서 숙박이 모자르게 되면서 교회가 그 역할을 했다. 교회에 십자가 높게 걸리게 되는 이유는 멀리서 오는 손님들이 제대로 잘 찾아오라는 뜻에서 높게 그리고 크게 걸어놓는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