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유배형
[역사속 경제리뷰] 유배형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0.25 12: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KBS 드라마 정도전 한 장면.
KBS 드라마 정도전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유배형 혹은 유형(流刑)은 죄를 지은 자를 변방이나 외딴 섬 같은 오지로 보내는 자유형을 말한다. 고대국가에는 ‘교도소’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유배형을 대신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교도소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유배형이 상당히 무거운 형이면서 끔찍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받고 싶지 않은 형벌이었다. 흔히 사극에서 함거에 소가 이끄는 것으로 유배형의 이미지가 있는데 현실은 달랐다.

교도소가 없는 이유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에 교도소가 없는 이유는 죄인들을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옥에 갇힌 죄수를 관리하는 관청인 전옥서가 있었고, 옥사(獄舍)도 있었다. 하지만 옥사는 일종의 미결수를 가둬두는 개념으로 현대의 구치소와 같은 개념이었다. 죄인의 형벌이 확정되기까지 일시적으로 가두는 장소가 바로 옥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징역형이 없었기 때문에 교도소가 따로 없었다. 대신 유배형이 바로 징역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징역형이라고 하면 짧게는 몇 년에서 몇십년을 나라가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예산 등이 없기 때문에 교도소를 따로 두지 않고 유배형을 대신했다. 유배형은 관리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내다버리는 수준이었다. 즉, 어디로 귀양을 보내면 그 지역 관리만 일정기간 동안 들여다볼 뿐 그 죄인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나라에서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앗다.

장형 100대부터 우선

유배형에 처했다는 것은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에 따라 거리에 관계 없이 일단 장형 100대를 받아야 했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노비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유배형을 내리는데 사실은 장형 100대를 맞게 해서 죽이려고 했다. 즉, 사극에서 ‘유배형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유배를 보내는 수준이 아니라 일단 장형 100대부터 맞고 난 후에 유배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죽이는 것이다. 물론 형벌이 문란한 시기에는 장형 대신 벌금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고, 장형을 대신 맞는 노비들도 있었다. 이러 이유로 유배형에 처한 사람들 중에는 벌금이나 노비가 대신 맞는 것으로 장형을 면제 받는 경우가 발생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 한 장면.
MBC 선을 넘는 녀석들 한 장면.

고통스런 유배길

장형 100대를 맞은 후 유배지로 떠나야 하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2천리(800km), 2천500리(1,000km), 3천리(1,200km) 등으로 나눠서 유배를 보낸다. 조선땅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2천리 밖으로 유배지를 보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부러 먼거리를 돌아서 유배지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흔히 사극에서 나오는 소가 이끄는 수레에 실려서 편히가는 것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걸어서 가야 했다. 왜냐하면 소는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동물이기 때문에 유배지로 향하는데 노동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선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소 달구지 타고 가면 죄인들은 그야말로 험난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걸어서 가야 했다. 이미 장형 100대를 맞은 상태에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유배지 가는 도중에 죽어야 했다. 물론 돈 있는 양반들은 당나귀를 대절하기도 했지만 돈 없는 양반들은 걸어가다가 죽는 경우가 발생했다. 여기에 몇월 며칠까지 어느 관아에 도착해야 한다는 등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천천히 걸어가는 것도 안된다.

유배지에서의 생활도

유배지도 죄의 경중에 따라 달랐다. 경기도나 강원도 내륙에 귀양 가는 경우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죄가 중한 사람은 함경도로 유배를 가는 경우도 있고, 그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면 섬으로 유배를 갔다. 물론 강화도도 있지만 이는 왕실 인사만 갔다. 그 이유는 강화도가 물자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한양과 가깝기 때문이다. 섬으로 보내졌다는 것은 사실상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섬은 물자가 풍부하지 않을뿐더러 ‘식수’인 물도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의 생활비는 죄인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돈이 없으면 유배지에서 본인이 직접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 귀족 양반들은 이를 위해 평소 돈이 많은 사람들의 뒷배를 봐주다가 유배를 가면 함께 가서 그들에게 생활비를 바치게 했다. 죄인을 감시하기 위해 지방민 중 형편이 조금 되는 사람을 보수주인으로 지정해 감시하게 했지만 보수주인 역시 당장 먹고 살기 바빴기 때문에 죄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앗다. 이런 이유로 유배지에 온 죄인들 중에 태반은 구걸로 연명하거나 의식주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들이 음식을 해서 보내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배지에 도착하면 모든 음식이 썩었고, 그나마 젓갈류가 온전히 보존될 정도였다. 물론 정치적으로 휘말려 유배를 가는 경우 지방관(수령)은 언젠가 저 사람은 한양으로 올라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배려를 해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되면 죄인들은 훈장이 돼서 서당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