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건빵류가
고대와 중세는 휴대가 편하고 보존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육포, 염장고기, 견과류, 말린 과일, 건빵, 쉽비스킷 등이 전투식량이었다. 특히 건빵이나 쉽비스킷은 그 유래가 깊다. 고대 이집트 선원이나 로마군이 먹었던 것인데 십자군 전쟁 당시 ‘무슬림의 비스킷’이라고 부르기도 햇다. 쉽비스킷은 주로 해군에서 사용됐는데 오랜 항해를 견뎌내야 했기 때문에 밀가루로 반죽해서 불에 몇 번을 구워서 수분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러면 곰팡이는 발생할 수도 있지만 부패는 되지 않았다. 문제는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먹기에 불편했다. 오죽하면 창과 칼이 없으면 쉽비스킷으로 싸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쉽비스킷을 휘둘러서 적군의 머리를 깨부셨다는 일화도 있다. 오죽하면 19세기 영국 해군 군율에는 ‘절대 식시사긴 중에 건빵을 던지지 말 것’이라는 규칙이 있었고, 미군 군가 ‘They Say That in the Army’중에도 “군대 빵이 죽여준다더니 식탁에서 떨어진 빵에 내 친구가 맞아죽었어요”라는 가사가 있다. 그만큼 딱딱했다는 이야기다. 몽골이 전세계를 지배할 때 겨울이 가까워지면 기르던 가축을 잡아서 말려 ‘보르츠’라고 부르는 육포를 만들어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다. 유럽이 이런 몽골군의 모습을 보고 보르츠를 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향신료나 소금이 귀했던 유럽으로서는 소금과 향신료 없이 보르츠를 만들다보니 누린내 때문에 먹지 못했다고 한다.통조림의 발명
근대에 들어서면서 전투식량이 점차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전장에서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1809년 당시 프랑스 정부는 대량의 음식을 값싸게 보존하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1만 2천 프랑의 상금을 걸고 공모전을 열었고, 니콜라스 아페르가 유리 병안에 조리한 음식을 넣고 병을 봉인하는 이른바 ‘병조름’을 만들었다. 다만 병조림은 유리병이기 때문에 잘 깨지는 문제가 있었고, 영국인 피터 듀란트가 1810년 원통형 주석 캔으로 통조림을 만들어 특허를 냈다. 이후부터 전투식량은 점차 다양화됐다. 통조림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백만명의 병력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전투식량이 됐다. 하지만 1차 대전이 끔찍한 참호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통조림을 더욱 맛있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통조림의 종류는 다양화됐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군인들이 따로 힘들게 조리할 필요가 없는 식량 개발에 힘을 쓰게 됐다. 그러면서 오늘날 전투식량이 발명되기에 이르렀다.인절미는 중요한 전투식량
우리나라의 경우 전투식량은 북어, 찐쌀, 미숫가루 그리고 인절미가 있다. 전투 직전 군대는 군량미로 인절미를 만들어서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인절미가 중요한 전투식량이 된 것은 적당한 크기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소지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인절미라고 하니 흔히 부드러운 식감을 생각하는데 물 없이 먹기에 힘들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덩어리였다. 조선시대는 인절미 이외에도 가래떡을 전투식량으로 만들었다. 물론 오늘날처럼 부드러운 가래떡의 식감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군인들은 미숫가루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것을 물에 타서 먹기도 하고, 그냥 입에 털어 넣기도 했다. 고구려 때는 삶을 콩을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다녔는데 말의 체온과 짚에 있는 발효균에 의해 변질되면서 전국장이 됐다. 그리고 그 전국장이 오늘날에는 청국장이 됐다. 조선시대는 두부도 중요한 전투식량이었다. 물론 오늘날처럼 부드러운 식감을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조선시대는 전투식량을 준비하지 않는 군인들을 처벌했다고 한다. 그만큼 전투식량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씨’를 휴대하게 했다. ‘무’는 겨울철을 제외하면 기르기 쉽고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만약 군대가 한 달 이상 주둔한다면 무를 길러서 먹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