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원산총파업
[역사속 경제리뷰] 원산총파업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1.04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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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원산총파업 또는 원산노동총파업은 원산노동자연합회가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일으킨 대규모 파업이다. 원산은 개항을 하면서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됐고, 일본은 원산을 거점으로 이북 지역 경제를 장악해 나갔다. 이런 이유로 원산에 가장 먼저 철도를 놓을 정도로 원산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했다.

원산 주목한 일본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제물포, 동래 그리고 원산 개항을 요구했다. 제물포는 서해안, 동래는 남해안 그리고 원산은 동해안의 거점 항구로 생각했다. 그것은 원산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산은 항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만으로 돼있기 때문에 태풍 등에도 안정적인 항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항 이전까지는 아무도 원산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이 주목을 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들어갔다. 원산은 1924년 당시 토박이가 4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외지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항을 하자마자 경원선이 부설됐다. 한양에서부터 원산까지 철도가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원산 인근에 공업지대가 조성되면서 흥남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시절 관북지방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면서 항구로 성장했다. 특히 개마고원 등에서는 막대한 천연자원 공급이 이뤄졌기 때문에 공업도시로의 성장이 가능했다. 이에 일본기업들이 원산에 대규모로 진입을 하면서 원산 지역 경제를 쥐고 흐드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떠나는 소리에

조선인들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원산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함경도 지역에 ‘신고산 타령’이라는 노래가 있다.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떠나는 소리에 큰 애기 반봇짐만 싸누나”라는 노래인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수탈에 못 이겨 도회지인 원산으로 떠나는 남편과 아내에 관한 노래이다. 함경도 지역 주민들이 원산으로 몰려가서 노동자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인 감독관의 폭행과 폭언이 이어지면서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했다. 부당노동행위, 차별, 폭력 등이 빈번하면서 노동자들이 점차 단결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여러 공장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됐고, 1925년 ‘원산노동연합회’가 결성됐고, 회장으로 김경식이 선출됐다. 1928년 9월 원산 인근 문평 제유공장이라는 회사에서 ‘고다마’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무차별 구타를 자행이 되면서 노조는 고다마의 징계를 요구했지만 사측이 묵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고다마 징계 요구가

그 소식이 원산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면서 그동안 일본인 기업가 혹은 일본인 감독관에게 받았던 설움이 치솟으면서 파업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총파업은 1929년 1월 22일부터 시작됐다. 파업 당일 두량노동조합, 해륙노동조합이, 23일 결복노동조합과 운반노동조합이, 24일에는 중사조합과 제면노동조합이, 27일에는 양복노조가, 28일에는 우차부조합과 인쇄직공조합이, 2월 1일에는 양화직공조합이 파업을 했다. 그 숫자가 2천2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단순히 총파업만 한 것이 아니라 금주를 결정하면서 매일 5전의 돈을 모으기로 햇다. 그렇게 해서 파업 기금과 5개월 분의 식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원산 행정과 산업이 마비됐다.

탄압에 나선 일제

원산에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제는 즉각 탄압에 나섰다. 함남 지역 경찰관 1천여명이 원산으로 집결해서 파업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공격했다. 그리고 일제가 군대를 원산에 주둔시켜 마치 계엄령을 선포한 듯한 위압감을 보여줬다. 경찰의 수사가 본격화됨녀서 파업 지도자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고, 파업 노동자들의 해고 조치가 단행됐다. 하지만 원산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계속 이어졌고,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조직해 치안을 담당하고, 회사들의 노동자 모집을 막았다. 또 유인물을 제작 및 배포하여 사람들에게 파업의 정당성을 널리 알렸다. 이같은 소식이 들리면서 신간회와 전국 각지 단체들과 시민들이 성금을 보내왔고, 중국, 프랑스, 소련에서도 격려를 보냈다. 일본인 노동자들도 파업을 지지한다는 연대의 뜻을 보내왔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가혹하게 탄압을 했다. 또한 어용노조를 만들어 폭력사태를 발생하게 하면서 결국 4월 21일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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